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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

by 엄지왕자 aka C FLOW

교회 가는 날, 아들을 카카오택시에 태우고 나는 휠체어로 혼자 갔다.


걷기에 좀 멀고 같이 다니기에는 장애인콜택시가 원하는 시간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저상 버스 타라니까..'

와이프에 볼멘소리가 서운하다. 버스 타면 아들과 같이 교회 갈 수 있을 텐데 왜 고집 피우냐라는 말이다.


버스가 서고 기사가 귀찮은 듯 발판을 내리는 시간.. 그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불편해서다. 와이프도 그걸 안다. 그럼에도 같이 타라는 것은 아들이 혼자 카카오택시에서 아빠와 함께하지 못하는 허전함을 더 크게 봤던 것이다.


휠체어로 20분 차로 5분. 그 15분 차이가 원치 않은 시간으로 벌어친 차이다. 나는 그 15분이 불안하다.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들이 교회에 잘 도착했을까' '기사님은 친절할까' 등의 생각으로 교회 가는 나의 20분은 아들의 5분을 걱정하게 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는 장애다.


일본의 구가야마 신이치로 교수는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


내가 의존하고 싶은 것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버스나 지하철 손잡이가 아닌 휠체어석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사람들 사이에서 출입을 방해하는 휠체어로 치부되는 것이 힘들어서다. 통제할 수 없는 장애인콜택시 보다 원하는 시간에 버스도, 카카오택시도 타고 싶다.


내가 의존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생각되는 순간 두려움이 스며든다. 두려움은 내 가족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오늘 교회에 가는 날처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고 싶지 않다.


어쩌면 누구나 그 의존과 통제가 가능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를 강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원치 않는 상황을 마주하며 두려워할 때가 있다. 상대적인 두려움에 매몰되고 싶지 않다.


오늘 평소와 달리 와이프의 '저상 버스 타라니까..'라는 말이 도전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선택 가능한 또 다른 것에 도전할 때 나랑 아들이 교회 가는 시간도 함께하는 시간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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