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과 다른 기록에 흔들리지 않기
걱정과 달리, 내 몸은 건강할 때 보다 피곤할 때도 움직이고 있다. 밀린 업무를 마치고 수영을 했고 집에서 설거지도 했다. 아내가 손목이 아프다며 파스를 붙여달라고 했을때 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아들은 잠이 안온다며 나랑 자고 싶다고 한다.
퇴근 후 잠들기 까지 회사와 다른 세계 속에서 나를 의지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감사하면서도 무거운 책임감을 들게 한다. 가끔 그 책임감 때문에 두려움도 있지만, 아버지가 내게 했던 것처럼 술 드시고 노래 부르며, 비닐 봉지에 통닭을 툭 던지고선 방에 들어가던 모습이 있기에, '나는 아빠처럼 하지 말아야지'라고 했던 기억 때문일까, 애써 피곤함 보다 '아빠 왔다'라는 밝은 목소리로 집에 들어가고 싶었던 내 마음이 아빠의 과거를 밀어내고 있다.
과거의 흐름대로, 아빠의 분노와 말투가 투영될 때면, 어김없이 나 또한 취했을 때 그렇게 했다.
'아버지는 나 처럼 휠체어를 타고 있지 않지만, 나는 휠체어를 탔으니까 더 힘들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라는 마음도 있었다. 간혹 명절 때마다 별거 아닌 일상도 부풀려서 아버지에게 '나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어요' 를 인정받고 싶었다.
때때로 그 무섭던 아버지의 말투가 약해보이는, 내가 40살이 될 무렵 부터 '아빠가 약해 보인다'라고 느낄 무렵 부터 '난 아버지랑 달라' 라는 모습을 더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은 '나도 아버지처럼 가정을 꾸리고 있어'라는 마음 보다 '나는 아버지랑 다르게 살고 있어' 라는 마음이 더 컷던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가 주는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헤어질 무렵 내가 예약한 장애인콜택시가 또 말썽이다.
"우리 아들 집에 언제가냐"
아버지의 말투가 나를 약올리는 것 처럼 느껴졌다.
"걱정마세요. 금방 가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내 뱉은 말과 달리 나는 할 수 있는게 없는 그저 장애인 아들처럼 보이는게 싫었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나는 연약한 아들이면서 동시에 가족을 꾸리고 있는 남편이자 아빠다. 그 여러 갈래의 직책을 상기시켜줄려고 반복하는 나의 철 없는 모습에도 아버지는
"그래, 그럼 아빠먼저 갈께"
라는 말에 서운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도 아들인데, 강한 척 말하던 내 말투는 사그러지고 아버지의 그 말 한마디에 서운한 표정을 감출 수 없다. 누나네 집에서, 그렇게 50분이 지나 장애인콜택시가 왔다.
집에 도착한 성남의 날씨는 비를 뿌렸다.
그걸 알았다는 듯이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에게
"아들, 집에 도착했어? 아빠 잠들었네"
"네, 벌써 도착했죠. 주무세요."
일년에 한 두번 보는 그런 사이가 된 나와 부모의 관계처럼, 내게 기록된 시간은 역사처럼,
아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