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 기분 드럽드라고요.
얼마전 배우 윌 스미스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떠한 이유가 있어도 사람에게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되지만, 그 일이 놀랍게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벌어진 거죠. 갑자기 뺨을 맞은 크리스 록은 당황해서 말을 잠시더듬거렸고, 곧 그의 눈이 빨개지더니 눈물이 어렸습니다. 사실 크리스 록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 눈가가 촉촉해진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프더군요. 저여도 공개된 장소에서 누군가가 느닷없이 제 뺨을 때린다면 눈물부터 날 거 같으니까요.
여러분, VR의 세계에선 이 심난한 상황을 실감나게 체험해볼 수 있답니다. 한 영상제작 회사에서 발 빠르게 크리스 록의 시점과 윌 스미스의 시점으로 360도 영상을 만들었거든요. HMD를 착용하고 보셔야 실감납니다.
크리스 록의 시점에서 재현 VR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Lc_kxJv8FRw&t=1s
재미있다는 댓글, 그 상황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쓴 댓글도 많았지만, 가장 많은 댓글들은 그 당시 크리스의 심정을 실감할 수 있었다는 댓글이었습니다.
The silence after Chris said “I’m going too”….omg….and Chris saying “Boy I could….oh ok..”… The feeling of him wanting to retaliate but not able to! That was a horrible feeling! (크리스가 “I’m going too”라고 말한 후의 침묵. 맙소사. 그리고 크리스가“Boy I could….oh ok..”라고 말했을 때, 그가 보복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그 느낌! 그건 정말 끔찍한 느낌이었어! )
Chris you're not alone now, almost 1 million people got slapped with you...love you bro (크리스,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거의 백만 명이 당신과 함께 뺨을 맞았어... 사랑합니다 형제여.)
Seeing this is actually scary cause imagine how Chris felt with a FULL theater and it being broadcasted all over the globe. (이 영상을 보는 건 정말 무서웠어 왜냐면 크리스가 극장에서 어떻게 느꼈는지 그리고 그것이 전 세계에 방송되는 것을 전부 상상할 수 있었거든. )
Since I’ve seen a lot of Will slap Chris through memes, I was shocked by the slap even though I was ready for it. Damn you can feel everything Chris feels in this video. (윌이 크리스를 때리는 것을 인터넷 밈으로 많이 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음에도, 그 폭력에 충격을 받았다. 젠장, 나는 이 비디오에서 크리스가 느끼는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어.)
This was hilarious as a comedy video right up until about 45 seconds, but then the silence and everyone staring while waiting for your reaction made it a horror real quick. (약 45초 정도까지만 해도 코미디 영상으로 재미있었지만, 그 뒤로는 침묵과 관객들이 당신의 반응을 기다리며 쳐다보는 장면이 순식간에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댓글로 화면으로 이 사건을 봤을 때와 VR 영상으로 직접 뺨을 맞는 체험을 했을 때의 경험이 달랐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VR 영상에서는 크리스의 시점에서 윌이 다가올 때의 감정, 그가 말을 더듬을 때의 감정, 무대 밖의 사람들이 그들 쳐다볼 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막상 뺨을 맞아보니 (=뺨을 맞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해보니) 크리스가 그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는 것에 놀랐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저 역시 영상에서 윌 스미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움찔하고 놀라게 되더군요. 그리고 뺨을 맞고 나자 ‘욱’ 하고 화도 났습니다. 무엇보다 모멸감, 침묵이 주는 곤혹스러움이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죠. 이 영상을 체험하기 전에는 크리스가 안됐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뺨을 맞고 나니 그의 상황에 ‘동정’이 아닌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VR의 열 두 번 째 정의 : VR은 경험 자체를 관찰하는 기술이다
재런 러니어, <가상현실의 탄생>
VR의 세계에선 나를 둘러싼 공간이 변하고, 나라는 존재가 변하기도 합니다. 영상 안으로 들어가 모네의 정원을 방문해 보거나 안네 프랑크가 살던 집을 방문해 볼 수 도 있고, 거대한 고릴라가 되어 벽을 타고 오르거나, 하늘을 날며 우주선을 모는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 스트레스를 받으면 VR 속으로 도피해 좀비에게 총을 쏘며 울분을 터트리곤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만나보지 못한 타인이나 그가 속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이야기를 듣거나, 문서를 읽으며 상상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사진과 영상이 등장하고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타인의 삶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르포나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데, 이렇게 체험이 살아 있는 현장 취재 기사를 읽거나 탄탄하게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볼 때면 만나보진 못했지만 그들의 속마음을 좀 더 알게 된 것 같아서 내적 친밀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타인의 마음에 대해 짐작만 할 뿐, 실감은 할 수 없겠죠.
VR 역시 타인과 다른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기존의 방법보다 좀 더 몰입감을 느낄 수 있는 형태로 제공되죠. 앞서 언급한 크리스 록의 시점에서 재현한 VR 영상처럼요. 직접 타인이 되어 보는 체험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좀더 실감할 수 있게 되고 그를 통해 더 많은 공감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참교육은 무릇 역지사지 아니겠어요... 윌 스미스도 꼭 저 VR 영상으로 자기가 뺨 맞는 체험을 해봤으면 좋겠네요.)
그렇다면 타인과 타인의 삶을 체험해 볼 수 있는 VR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지금부터 몇가지 VR 영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실감나는 영상을 통해 공감의 효과를 누리려 했던 감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레버런트>와 <버드맨>으로 잘 알려진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입니다. 그는 2017년 <육체와 모래(Carne Y Arena)>라는 VR 영화를 발표하는데요. 목숨을 걸고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는 난민들을 VR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HMD를 착용한 관객은 영화만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세트로 안내됩니다. 감독은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관객을 특별히 설치한 모래사장에 맨발로 걷게 합니다. 관객이 맨발로 국경을 넘던 난민의 상황을 느껴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관객은 영화속에서 난민의 일부가 되어 쫒기다가 체포되는 상황에 처해집니다. 영상 속 난민이 경찰의 강압에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을 때 관객도 함께 무릎을 꿇게 되는 거죠. 기존의 영화 관객이 스크린 바깥에서 사건을 바라보던 존재였다면, 이 영상에서는 관객이 사건 속으로 들어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실 이 작품은 저도 못 봤어요. 유튜브 소개 영상만 봤습니다. 처음에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VR 영상으로 볼 수 있을까 찾아봤지만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아직 특정한 장소에서만 상영한다고 합니다. 현재는 미국 텍사스 달라스의 페어파크에서 상영중이네요. 언젠가는 서울에서도 만나 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난민의 입장이 되어 그 공포와 불안을 체험한다면 우리가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질지 모릅니다. 난민은 우리 삶 속에도 존재하는 이웃이고, 또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우리도 난민이 될 수 있으니까요.
<육체와 모래(Carne Y Arena)> 유튜브 소개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Al7pwMVs04&t=22s
2003년 3월,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공격명령을 내렸을 때 저는 뜬 눈으로 밤을 샜습니다. 폭탄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도시의 사람들은 무슨 마음으로 이 밤을 보내는 걸까 싶어서요. 그리고 최근엔 매일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참담한 소식을 전해 듣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숨지는 꽃 다운 나이의 청년들, 적군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여성들과 부모와 헤어지는 아이들... 아마 제가 직접 전쟁을 겪기 전에는 그 고통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죠.
그 고통을 감히 짐작할 순 없지만 조금이라도 체험을 해보면 전쟁의 참상에 대해 좀더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취지로 제작된 VR 영화가 있습니다. <Home After War>인데요, 이 영화에서 우리는 팔루자의 한 집으로 초대됩니다. 팔루자는 2016년까지 이슬람국가(IS)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이죠.
전쟁이 끝난 후 팔루자 주민들은 옛집을 찾아 돌아가지만 그 집은 예전과는 다른 곳입니다. 마을과 집안 곳곳은 부서져 있죠. IS는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집안 곳곳에 폭탄과 부비트랩을 설치했다고 합니다.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적군이 설치한 부비트랩을 제거하기 위해 혼자 집에 들어갑니다. 이때 집은 안식을 위한 장소가 아닌 공포로 가득한 공간이 됩니다 .관객은 아메드 하미드 칼라프(Ahmaied Hamad Khalaf)의 집에서 그의 설명을 들으며 집안 곳곳을 살펴보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고,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을 어떻게 빼앗아 가는지 간접적이나마 살펴볼 수 있게 되죠.
<Home after war> 소개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xF1fUT-NXHc
갑자기 시력을 잃는 것을 상상해보신 적 있나요? 불편함 없이 지내던 일상에서 갑자기 기존에 볼 수 있던 것들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어떤 심정이 될까요? 존 헐( John Hull)이라는 작가는 45세의 나이에 갑자기 시력이 쇠퇴하고 실명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일상으로 여겼던 모든 것이 뒤바뀌는 경험, 그는 이 경험을 오디오 일기를 통해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의 오디오 일기를 통해 실명이 처음엔 작은 장소에 갇힌 듯한 느낌을 주고, 시각적 자극에 대한 갈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시각의 상실에서 멈추지 않고 단절된 감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모든 감각을 재배열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의 일기는 <notes on blindness>라는 다큐멘터리영화로 만들어졌는데요, 영화와 함께 VR 앱도 출시가 되었습니다. VR에서는 그가 갑자기 단절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를 다루는데, 영상은 그래픽으로 재현하고 오디오는 그가 실제로 공원에서 한 녹음을 활용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실명의 상황을 시각을 활용해 체험하는 순간이지만, HMD를 착용한 관객은 그의 입장이 되어 그가 공원에서 느꼈던 것처럼 빛과 소리로 대상을 인식하고, 개가 짖는 소리에 몸을 돌려 움직임을 추적하게 됩니다. 행동이 없으면 어떤 소리도 나지 않고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한 챕터에서는 그(=관객)가 집 밖을 나섰다가 패닉을 겪는 순간이 재현됩니다. 갑자기 화면이 어두워 지고 아무 것도 볼수 없는 순간을 겪습니니다. 발밑은 까막득해지고 들리는 것은 오직 심장소리입니다. 관객은 순간 어두워진 화면에 당황하게 되는데요, 이를 통해 더이상 물리적 공간에서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공포 또한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잠시 체험한 이 공포는 시각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공포겠죠.
실명에 관한 메모 <notes on blindness> 유튜브 소개
https://www.youtube.com/watch?v=tb5DwAZIQZw
아침에 눈을 떴는데, 지금 북한에서 핵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는 중이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면, 여러분은 무엇부터 하시겠어요? 황당한 질문 같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2018년 1월 13일 하와이에서요. 아침 8시 8분에 하와이 140만 시민들에게 ‘지금 탄도 미사일이 발사되었으니 피난소를 찾으라’’는 메시지가 왔던 거죠. 하와이에 웬 미사일? 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와이는 북한 탄도미사일의 사정권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런 경보시스템이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날 아침의 상황을 담은 VR 영화가 <on the morning you wake>입니다.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했던 하와이의 주민들은 메시지를 통해 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다는 정보를 받게 되죠. 이것은 훈련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경고까지요. 그 상황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방공호를 찾아 뛰고, 누군가는 욕조에 숨고, 누군가는 집에 머물러 죽음을 선택하길 결심했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은 죽기 싫다고 울고, 딸들을 업고 뛰던 아빠는 방공호에 자리가 없어 절망합니다. 여러분이었다면 그 상황에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지금이야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볼 수 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지금처럼 생각할 여유가 있을까요?
다행히 38분 후 그 메시지는 거짓임을 밝혀졌습니다. 하와이 긴급사태 관리청에서 훈련도중 실수를 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 38분 동안 사람들은 지옥을 겪었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스토리텔링과 가상제작기법으로 재현된 그날의 경험담을 우리는 VR영상을 통해 함께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엔 많은 의문이 떠오르게 되죠.
만약 정말 핵미사일이 날아온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그리고 핵 폭발에서 살아남는다면 어떤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이들에게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아니, 우리의 운명이 이렇게 간단하게 결정되어져도 되는 건가?
지구상에서 핵 무기를 사라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영상은 지난 3월 25일에 첫 공개되었는데요, 그저 담담히 볼 수 없었던 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핵무기를 사용하는 상황은 1945년이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슬프게도 21세기에도 20세기의 야망은 계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영화 속 공포는 단 38분이었지만, 현실의 공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yTb_56XzN8
VR은 최근 심리 치료의 목적으로도 사용된다고 합니다. 피해망상이나 편집증이 있는 환자에게 VR 체험을 통해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상황이 실제로는 안전하다는 것을 실감시켜 주는 거죠. 실제와 비슷한 체험은 이렇게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VR의 아버지로 불리는 재런 러니어는 ‘기술의 변화를 통해 우리가 기술을 초월하는 가치를 내면에서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면 마찬가지로 체험을 통해 상황이나 상대방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요?
N번방 피해자의 고통을 느껴볼 수 있다면,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절망을 이해할 수 있다면,
대중교통에서 휠체어 사용이 얼마나 불편한지 실감할 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마치 내 것처럼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당장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를 멈추고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행동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가상현실’이라는 기술이 가져오는 미래는 우리가 좀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미래’가 되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