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발에 물집 6개... 고비가 왔다
▲ [남자 찾아 산티아고 10] 바늘과 실을 든 기사들ⓒ 정효정
사실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은 했다. 지금 시대에, 걸어서 800km를 간다는 행위는 어쩌면 인류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 아닐까. 그것도 한국에서 파리까지는 비행기로, 파리에서 생장피데포드까지는 고속열차로 와놓고는, 이제 와서 새삼 걷기 시작한다는 건 조금 낯간지럽기도 하다.
그 비효율성을 확실히 느낀 계기가 있다. 빰쁠로나에서 만난 한국 순례자 동생이 몇 구간을 버스로 건너뛰겠다고 했다. 귀국 비행기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다. 물어보면 안 되지만 결국 물어봤다.
"거기까진 얼마나 걸린대?"
"50분요."
로그로뇨에서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Santo domingo de calzada) 까지는 52km다. 걸어서 이틀이 걸린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면 단 50분이라는 거다. 어쩐지 속이 쓰려온다. 이왕 판도라의 상자를 연 김에 하나 더 물어봤다.
"버스비는 얼마야?"
"... 2유로요."
아아, 버스비라도 비싸길 바랬는데... 이틀간 내가 길에서 쓰는 돈은 숙박비와 식사비를 포함해 대략 40~50유로 정도다. 이쯤 되면 내가 대체 왜 걷고 있는 건가 회의감이 든다. 무엇보다 발이 점점 아프기 시작했다. 물집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 순례자들의 신발 이 신발을 신고 하루종일 걷다보니 발에 물집은 통과의례였다ⓒ 정효정
▲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 발이 아픈 순례자 모양의 동상 ⓒ 정효정
처음 물집이 생긴 것은 에스텔라에서였다. 시작은 발 앞꿈치의 작은 물집이었다. 인터넷에서 배운대로 실과 바늘을 소독한 후 물집 안에 넣어서 터트렸다. 하지만 뭘 잘못했는지 이 물집이 덧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주변에 2호, 3호 물집이 생기면서 전체 물집의 면적이 넓어졌다. 뒤이어 둘째 발가락 옆, 새끼발가락 옆 등 다른 부위에도 물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양 발을 합쳐 총 6호까지의 물집이 생겼다.
사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발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걸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물집이 생기면 움직이지 못하고 무조건 쉬어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사람은 발에 물집이 있어도 걸을 수는 있었다. 문제는 걸을 수는 있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일단 걷기 시작했다가 잠시라도 멈추면 발의 통증이 더 심해졌다.
▲ 순례자 그리고 신발 길을 가다보면 망가진 신발을 이정표처럼 두고 간 흔적을 볼 수 있다 ⓒ 정효정
결국 나는 쉬지 않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멈추지 못하고 걸으면서 어렸을 때 읽은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 생각을 했다. 쉬지않고 걷는 모습이 춤이 멈추지 않는 빨간 구두를 신은 카렌같다고. 가여운 카렌의 이야기는 나무꾼이 도끼로 그녀의 발을 잘라내면서 끝난다. 그 시절, 허락받지 못한 욕망은 잔인한 교훈으로 끝나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내가 좀 욕망한다고 누구도 내 발을 자르진 못할 것이다. 타인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이제 누구도 내 욕망에 허락을 내릴 권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발은 아팠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걸어서 800km를 간다는 건 확실히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그럼 어떤가. 내가 원해서 가겠다는데.
▲ 순례길의 포도밭 계속해서 포도밭과 와이너리가 이어진다ⓒ 정효정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에 도착하자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알베르게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라뇽 (Granon)이라는 마을까지 6km를 더 걷기로 했다. 혼자 걷는 6km는 더 힘들었다. 고속도로 옆을 계속 걷다보니 저 멀리 언덕에 작은 마을이 보였다. 나중에는 발이 너무 아파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인어공주에게 처음 다리가 생겨 육지를 디뎠을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동화책에서는 유리조각 위를 걷는 느낌이라 했는데 내가 지금 그 기분이다. 인어공주는 육지에 찜해둔 남자라도 있었지. 난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걸까.
▲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의 닭 모양 과자 닭에 얽힌 전설이 있는 도시다보니 모든 기념품이 닭모양이었다ⓒ 정효정
▲ 그래논으로 가는 길 아무도없는 순례길을 혼자 걸으면 피로도가 가중된다ⓒ 정효정
기진맥진해서 그라뇽에 도착했다. 이곳에선 그라뇽 산 후안 교회에서 기부금으로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다. 좁은 돌계단을 따라 성당과 붙어있는 건물을 오르니 바닥에 매트리스가 가득한 공간이 나온다. 이곳이 오늘의 숙소다. 발의 통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발뒤꿈치를 사용해 쫑쫑쫑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적당한 매트리스를 하나 잡자마자 바로 쓰러졌다. 옆에 있던 사람이 말을 걸었다.
"발이 많이 아프니? 발목을 삔 거야?"
나는 간신히 새로 외운 영어단어를 내뱉었다.
"물집(Blister)이야"
물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한 할아버지가 약통을 들고 등장했다. 포르투갈에서 온 주옹이었다. 그의 약통을 보고 옆 사람에게 물었다.
"이 분은 의사야?"
"아니, 카미노를 10번 째 다니고 있는 사람일 뿐이지."
그의 약통에서 뭔가 대단한 게 나올까 했는데 나도 가지고 있는 바늘과 실이다. 하지만 그는 외과의사의 포스로 실과 바늘을 들고 신중하게 내 물집들을 하나하나 집도했다. 마치 중세의 기사가 바늘과 실을 들고 물집이라는 용을 무찌르는 것 같은 포스였다.
▲ 내 물집을 치료중인 주옹 거의 외과의사와 같은 집중력으로 물집을 집도 했다ⓒ 정효정
발을 치료하고 계단을 올라 샤워실이 있는 메인홀로 갔다. 그곳에는 보기만 해도 따뜻한 벽난로가 놓여있고,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 그리고 와인에 과일과 탄산수를 섞은 샹그리아가 순례자를 위해 놓여있었다.
그라뇽의 순례자 숙소는 생각보다 멋진 곳이었다. 무엇보다 700여 년 동안 순례자들을 맞이한 전통이 이 장소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식사시간이 되면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뒷정리도 함께 했다. 40여 명의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나서서 일하면서, 식사는 착착 진행되었다. 순례자들도 이 분위기가 신기한지 환한 웃음을 지었다.
▲ 40인분의 저녁식사 순례자들은 함께 샐러드를 만들고 식기를 세팅하고 설거지를 했다 ⓒ 정효정
저녁 식사 후, 순례자만을 상대로 잠시 미사를 드리는 시간이 있었다. 순례자 미사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독특한 문화다. 종교가 없었지만 순례자 미사는 꼬박꼬박 참가하는 편이었다. 숙소에서는 성당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를 통하면 곧장 성당의 2층으로 이어졌다. 촛불을 들고 잠시 각자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엔 미사를 진행하던 봉사자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 세계의 수많은 폭력과 죽음을 떠올려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행운을 누리고 있습니까. 누군가 죽어갈 때 여러분은 이곳에서 평화로운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여러분이 내면의 평화를 느꼈다면 마찬가지로 바깥에서 벌어지는 폭력에도 관심을 가져주세요."
마치 중학교 수련회에서 촛불의 맹세를 하는 분위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기도가 끝나고 서로 포옹하는 시간을 가졌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눈물은 흔히 마주친다. 이 길의 사람들은 평소보다 많이 움직이고, 평소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평소보다 자주 감정적이 되곤 했다. 흔히 도시의 삶을 '메말랐다'라고 표현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반대말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길은 사람들의 눈물로 촉촉했다고.
▲ 촛불로 만든 노란 화살 순례자 미사에서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정효정
다음날 22km를 걸어 토산토스(Tosantos)로 가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왔다는 알베르토였다. 그는 내 가방에 걸려있는 노란리본을 궁금해 했다. 그의 가방엔 파란 리본이 걸려있었다. 산티아고 북쪽 길의 한 성당에서 받았다고 한다. 그는 교통사고로 동생을 잃고 벌써 4번째 순례길이라고 했다. 나는 간단하게 한국의 노란리본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우리는 그 배를 잊지 않기로 결심했고 이 리본은 그 결심을 뜻한다고. 그는 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유감이야. (I'm sorry to hear that)"
영어표현 중에 늘 적응이 안됐던 게 이 'I'm sorry'였다. 물론, 영어단어 sorry에는 사죄의 의미뿐 아니라 유감의 의미도 있다는 걸 배우긴 했다. 하지만 일단 'I'm sorry'라는 말을 들으면 '대체 이 사람이 왜 내게 미안해 하는 거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물론 지금은 알베르토의 'I'm sorry'가 위로의 의미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위로에는 위로로 답을 해야 하는 것도.
"나도 네 동생의 일을 유감이라고 생각해."
▲ 순례길에서 만난 메시지 누군가 배지와 노란 리본을 두고 갔다ⓒ 정효정
토산토스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다. 오래된 3층짜리 나무 건물이다. 그래논의 알베르게와 마찬가지로 기부제로 운영되고,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잔다. 함께 준비한 저녁식사는 샐러드와 렌틸콩으로 만든 스프, 그리고 사과를 졸여 만든 디저트였다.
토산토스의 기도실은 오래된 나무 기둥과 서까래가 있는 아늑한 다락방이다. 길에서 꺾어온 갈대로 장식이 되어 있고, 중앙의 작은 제단에는 나무 십자가와 성경이 놓여있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 대한 다소 긴 설명을 끝낸 호스피탈레로 호세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노래를 불렀다. 공간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였다.
"Confitemini domino, quoniam bonus, Confitemini domino, Alleluia."
(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도다. 주께 감사하라, 할렐루야.)
▲ 토산토스의 알베르게 오래된 나무기둥이 있는 삼층 건물이다ⓒ 정효정
▲ 토산토스의 숙소 다락방에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자는 형태다ⓒ 정효정
기도시간의 마지막이 되자 그는 각 나라별로 종이를 나누어 줬다. 먼저 온 순례자가 기도문을 남기고 가면, 뒤에 도착한 같은 국적의 순례자가 그를 위해 기도해주는 거라고 했다.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각 나라별로 기도문을 읽어나갔다.
내가 읽은 기도문은 한 한국인 카톨릭 신자의 기도문이었다. 기도의 마지막은 '이 길을 통해 완전한 기쁨, 완전한 생명, 완전한 기도가 이루어지게 하소서'였다. 그가 편안한 마음으로 순례를 마치길 바라며 읽었다.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길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번엔 스페인로 쓰여진 기도문을 읽을 차례였다. 알베르토가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고 있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 안에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모두가 동시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온 릴리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알기에 무슨 영문이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 역시 눈이 빨개져서 대답했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읽은 아버지의 기도문이야."
▲ 토산토스의 기도공간 작고 아늑한 다락방이다ⓒ 정효정
더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스페인어를 이해하지 못해도 지금 이 방안에 흐르고 있는 미세한 에너지의 진동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각기 다른 나라,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모두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마음 앞에서 국적이나 종교와 같은 차이는 의미가 없었다. 각자 사랑하는 사람을 품은 존재로서, 자신이 품은 사랑만큼 함께 아파할 뿐이었다. 알베르토의 기도문 낭독이 끝나고도 방안엔 간간히 훌쩍이는 소리만 들릴 뿐, 침묵이 이어졌다.
미사가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다 겉옷을 자리에 두고 왔던 게 기억나서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여전히 알베르토가 앉아있었다. 많이 운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겸연쩍은 표정이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짧게 "I'm sorry"라고 말하고 다시 방을 빠져나갔다. '방해해서 미안해'라는 의미였지만, 내 위로의 마음도 함께 전해졌길 바라며.
▲ 어느 날의 위로 토산토스바위 성당에서 바라본 오후 5시의 하늘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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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말만 듣고 800km를 걸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