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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이 Aug 18. 2018

‘나’라는 골디락스 행성에 ‘천국의알바’라는 원소 하나

[알바천국 - 천국의 알바 18기] 천국의 알바가 내 인생에 미친 영향


  골디락스라는 이름의 소녀가 숲을 헤매다 곰 세 마리가 사는 오두막을 발견했다.
곰들은 모두 산책을 나가 있었고, 배가 고팠던 골디락스는 빈집으로 들어가
탁자에 놓인 세 그릇의 스프 가운데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고
먹기에 딱 적당한 한 그릇의 스프를 먹었다.

  영국의 전래동화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로부터 ‘이상적인 상황’을 지칭하는 용어 골디락스가 탄생했다. ‘골디락스 행성’은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아 생명체가 살기에 딱 알맞은 행성을 말하며, 태양계에서는 지구가 바로 골디락스 행성이다. 지구는 항성인 태양으로부터의 거리도 적당하고, 대기와 자기장을 잘 갖추고 있으며, 이모저모로 조합해 복잡한 구조로 진화할 원소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생명체를 키워낼 수 있었다.


  만약 ‘나’를 행성에 비유한다면 태양계의 어디쯤 가져다 놓아야 좋을까? 태양에서 너무 가까워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말고 다른 일은 할 수 없는 행성일까, 아니면 태양계 끝자락의 고요한 기체행성일까. 그것도 아니면 딱 알맞은 온도와 자기장을 갖춘, 몇 가지 원소만 던져주면 금방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골디락스 행성일까. 뻔하고 뻔뻔하게도 난 내 자신을 골디락스 행성에 비유하겠다. 딱 알맞은 잠재력을 품고 태어난 ‘나’라는 행성은 이미 진화의 필수요소인 몇 가지 원소를 만나 몇 번의 폭발적인 변화를 거쳐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발전을 거듭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생태계를 갖추게 될 것이다.

  내가 겪었던 여러 차례의 변화에 기폭제가 된 요소들을 머릿속으로 주욱 나열해봤다. 멀게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운영했던 도서대여점과 거기서 코를 박고 읽었던 수백 권의 책이, 가깝게는 대학 졸업 후 떠났던 6개월간의 남미배낭여행과 그 여행의 기억을 담아 책으로 만들었던 독립출판 프로젝트가 있다. 내 행성에 떨어진 작은 원소들은 서로 만나 더 복잡한 구조가 되고, 그 구조는 다시 더 큰 변화를 불러왔다. 그 때 그 순간에는 몰랐지만 내가 읽었던 책의 한 장 한 장이, 눈 질끈 감고 도전했던 여행과 독립출판의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내 모습으로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딱 한 조각의 퍼즐이었던 것이다.




‘나’의 행성에 새롭게 떨어진 원소 하나, ‘천국의 알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처음 천국의 알바 18기 모집 공고를 봤을 때부터 마지막 관문인 면접을 보는 순간까지 나는 매순간 당연히 내가 뽑힐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예지력이 있거나 영험하신 신령님이 귓가에 미래를 속삭여주셔서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 온 수많은 변화 끝에 천국의 알바 18기로 선정되기에 딱 알맞은 ‘골디락스’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묘한 확신을 갖고 모든 지원 과정에 임할 수 있었다. 천국의 알바 18기 활동이 끝난 지금, 또다시 변화의 움직임을 느낀다. ‘나’라는 골디락스 행성에 ‘천국의 알바’라는 원소가 하나 떨어졌다. 잠잠했던 지표면은 새로운 충돌과 결합으로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리고 더 복잡한 구조의 생명체가 나타나 또 다른 원소를 만나기를 기다리며 땅 위를 거닐 것이다.


크론보그 성 앞 바다에서 천국의 알바 18기 4인 단체샷

  천국의 알바 18기 4인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덴마크에서 ‘이야기를 담은 한식 만들기’라는 수행과제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프로젝트가 끝난 뒤엔 일주일간의 자유여행 기회도 주어졌다. 그 시간들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공책에 여과없이 쭉 적어봤더니 순식간에 한 쪽을 가득 채웠다. 그만큼 본 것도 많고 느낀 바도 많았다는 뜻일테다. 아무렇게나 적어내려간 내용들이지만 여러 번 읽어보니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 새롭게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겼다.
둘째, 한국과는 다른 생활 방식을 접하고 체득했다.
셋째, 남들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과정과 결과에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새롭게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겼다.

  3년 전 남미여행을 다짐했을 때 나는 무기력증에 빠져 매일 집에서 시간을 축내던 대학 졸업반이었다. 학과 생활이나 공부에 열성적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취업을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다 제껴놓고 실컷 놀았느냐 묻는다면 그것마저도 아니었다. 그저 매일을 공허하게 흘려보내기만 했다. 친구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한 걸음씩 자기 세상을 넓혀가는데, 내게 허락된 공간은 고작 좁은 침대 하나였다. 앞으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하는지 알 수 없어 막막한 기분이 날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만히 누워만 있는 게 질렸던 나는 책장에서 손 닿는대로 아무 책이나 뽑아 읽기 시작했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칠레의 바닷가 마을 ‘이슬라 네그라’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다. 마지막 한 장까지 막힘없이 넘기고 나자 내 귓가엔 책 속에 묘사되었던 이슬라 네그라의 파도 소리가 작게 맴돌았다. 그 때 생각했다.

  ‘이 소리를 들으러 가야겠다.’

  그렇게 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나니 축 쳐져있던 매일이 달라졌다. 여행자금을 모으기 위해 알바를 세 개씩 뛰었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일정을 수백 번 수정했고, 무거운 배낭을 이겨낼 체력을 기른다며 운동까지 꾸준히 했다. 남미여행이라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자, 그걸 이루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뒤이어 와 내 일상을 빽빽히 채운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는 남미에서의 감상을 담은 나만의 책을 만들고 싶어 독립출판 프로젝트에 도전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매일 내가 해야할 일이 뭔지, 그걸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명확히 알고 그대로 실천했던 나날이었다.


남미여행 중 페루 마추픽추 산 정상에 올라선 늠름한 뒷모습.

  하지만 이렇게 멋진 도전과 성취도 이제 지난 일이 되었다. 독립출판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서 조금 쉬겠다며 미래에 대한 걱정은 저 멀리 접어두었고, 몇 달이 지난 뒤엔 생활비를 벌어야겠다며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나, 어느새 나는 딱히 ‘하고 싶은 일’도 ‘해야할 일’도 없는 좁은 침대 속 세상으로 다시 흘러들어와 있었다. 그런 나에게 천국의 알바는 마침 딱 알맞게 나타난 도전 과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정말 고맙게도 천국의 알바 활동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접하면서 새롭게 ‘하고 싶은 일’과 ‘해야하는 일’들을 몇 가지 찾아낼 수 있었다.


  먼저, 자전거를 연습하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대중교통이 발달된 서울에 살다보니 여기에 불편함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코펜하겐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거기서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내 키의 절반이나 될까 싶은 어린 아이들까지도 두발자전거를 타고 내 옆을 스쳐지나갈 때, 바보된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자전거를 못타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배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내가 한심스러웠다. 덴마크에 다시 가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코펜하겐에서 능숙하게 수신호를 해가며 자전거를 타는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활동 중 나의 적성을 새로 발견하기도 했다. 이전에도 식당에서 알바해본 적은 있지만, 손님에게 음식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친절하게 서비스하는 곳은 아니었다. 천국의 알바 18기의 수행과제가 이야기를 담은 한식 메뉴를 만들어 원데이 팝업 레스토랑으로 덴마크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것이었는데, 이 때 레스토랑의 서버로서 손님들과 교류하는 것에 큰 흥미를 느꼈다. 팝업 레스토랑에서는 우리가 만든 메뉴를 처음 접하는 손님들에게 어떤 이야기가 담긴 음식인지,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소개하는 과정이 꼭 필요했다. 또 손님들의 다양한 요구에 맞춘 적절한 응대도 중요했다. 손님이 몰려들 땐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 음식에 담긴 이야기를 전하고 또 음식을 맛본 손님들의 의견을 듣는 일이 아주 즐거웠다.

  또, 팝업 레스토랑에 관해 받은 간단한 설문에 대다수의 손님들이 서버가 친절하고 알맞게 응대해주어서 좋았다는 의견을 남긴 것을 보았을 때 느낀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코펜하겐에 위치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108에서의 식사와 단체사진

  자유여행 중 방문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108에서의 경험은 레스토랑 서버 혹은 소믈리에라는 직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08은 캐쥬얼한 분위기와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으로 파인다이닝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다. 이 곳의 서버들은 친근하면서도 잘 갖춰진 서비스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손님의 취향이나 요구사항을 잘 반영해 서빙하면서 매 접시마다 재료와 먹는 방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잊지 않는다. 음식과 잘 어울리는 음료 추천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단순히 접시를 나르고 물을 따라주는 사람이 아니라, 음식에 대한 지식과 사교적이고 친근한 태도로 여러 손님들을 응대하는 전문직업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미식을 즐기고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어쩌면 딱 맞는 직업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여러 재능과 적성 중 전혀 몰랐던 한 가지를 천국의 알바 활동을 통해 찾게 된 것이다.

  

어쩜 이렇게 전부 다같이 엉망인지 모르겠는 코판 직원들과의 단체사진.

 천국의 알바 18기의 활동 무대였던 코펜하겐의 한식당 KOPAN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덴마크에 와 일하고 있는 또래의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대화를 나누며 외국에서 생활한다는 것에 대해 품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을 벗을 수 있었다. 그동안은 워킹홀리데이나 석사 유학을 통해 외국에서 오랫동안 머무는 일을 한 번쯤은 꼭 해봐야지 생각만 하고 계속 망설여 왔다. 부족한 언어에 대한 걱정, 생활비를 충당해야한다는 부담감, 그 생활이 끝난 뒤에 이렇다할 성과가 없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미리 걱정만 쌓아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와 나이도 성격도 상황도 비슷한 친구들이 덴마크에서 잘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 나도 자전거만 탈 줄 안다면 덴마크 워킹홀리데이를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 없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다음으로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해야할 일’은, 워킹홀리데이 혹은 석사유학을 준비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한국과는 다른 생활방식을 접하고 체득했다.

  함께한 팀원 중 한 사람이 덴마크에서 입버릇처럼 한 말이 있다.

  ‘이게 바로 리얼 휘게’

  장난조로 온갖 상황에다가 다 갖다붙힌 말이었지만, 사실 덴마크에서 마주친 거의 대부분의 생활방식은 정말 ‘리얼 휘게’였다. ‘휘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불리는 덴마크의 행복 비법으로 알려진 단어다. 편안함, 따뜻한, 아늑함, 안락함을 뜻하는 말로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또는 혼자서 보내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일컫기도 한다.

  천국의 알바 18기 지원 과정에서 이 단어를 처음 접했고, 3차 면접 땐 ‘누구보다 휘겔리하게 미션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접니다!’라고 씩씩하게 말하는 데에 써먹기도 했다. 하지만 덴마크에 실제로 발을 디디기 전까지는 ‘휘게’라는 개념이 또렷하게 와닿지 않았다.

  처음으로 ‘이것이 휘게인가’ 생각했던 순간은 샌드위치를 사서 공원에 갔을 때다. 연못과 나무 등으로 잘 조성된 공원 곳곳에 남녀노소가 편안하게 널브러져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는 웃통을 벗고 있었고, 누군가는 자기집 안방처럼 드러누워 있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았고, 아무도 다른 이를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았다. 처음엔 벤치에만 앉았던 천국의 알바 18기 4인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잔디 위에 드러눕게 되었다. 일정을 마치고 나면 저마다 마실 것을 사들고 공원으로 갔다. 원래부터 이렇게 해왔던 것마냥 익숙하게 자리를 펴고 고요한 시간을 즐겼다.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각자 책을 보거나 사진을 찍기도 하고, 아니면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있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잔디 위에 드러눕게 되었다.

  이렇게 질 좋은 휴식이 있는 삶을 체득하고 나니, 또 다른 ‘휘게’가 보이기 시작했다. 상점이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덴마크인들은 대부분 뭘 하든 조급하지 않고 여유로웠다. 필요 이상의 속도로 일하지도,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지도 않았다. 딱 상호 존중이 가능한 정도의 속도와 친절을 보여주었다. 언뜻 들으면 당연해 보이는 이 문화는 사실 기본 생활 여건이 잘 갖춰져 있어야 조성될 수 있는 것이다. 여유롭지 못한 삶이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한국을 생각하면 덴마크의 ‘휘게’가 부럽기도, 조금 속상하기도 했다.

  또, 덴마크인들은 자신이 소비하는 브랜드가 환경 보전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싸고 간편하고 양 많은 것 혹은 자극적인 것만을 좇는 소비가 아니라, 비싸고 불편하더라도 환경을 생각하는 브랜드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는 것이다. 이 역시 일상에 부족한 점 없이 기본 생활 수준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덴마크의 ‘휘게 라이프’를 짧게나마 온 몸으로 경험했다. 내가 알고 배웠던 생활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내 세상을 견고하게 완성하려면 더 많은 나라의 더 다양한 생활방식을 접해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들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과정과 결과에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남미여행을 할 때, 내가 올리는 사진과 여행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의 수가 꽤 많았다. 멋진 풍경 사진에다가 그럴듯한 말을 써서 올리면 순식간에 하트와 따봉이 알림창을 메웠다.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 그 숫자가 올라갈수록 점점 거기에만 집중하게 됐다. 내가 뭘 느꼈는지보다, 어떻게 포장해야 팔로워들이 보기에 멋있을까를 고민하는 나를 발견했다. 어느새 나는 여행을 하며 즐거웠는지보다, 팔로워들이 좋아요를 많이 눌렀는지를 보고 나의 행복을 따지고 있었다. 나의 행복이 오롯이 남의 평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끝도 없이 불행해졌다. 그래서 한 때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을 모두 삭제하고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은 인스타그램 계정을 다시 만들어 운영하고 있지만, 다행히 예전처럼 거기에만 매달리지는 않게 되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천국의 알바 18기에 뽑히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바로 ‘아싸 인스타에 자랑해야지!’였다. 인간의 본성이 나약해서인지, 아니면 남들에게 멋있어 보일만한 성취를 한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인지, 합격 소식을 듣고 처음 며칠간은 ‘어떻게 사진을 찍어올려야 촌스럽지 않게 잘 자랑했다고 소문이 날까?’하는 궁리를 했다.

  그렇게 궁리만 하다가 제대로 자랑도 못하고 코펜하겐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만 하면 유럽의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풍경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찍어서 자랑글을 잔뜩 올리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코펜하겐에 도착하고 이튿날,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고는 바로 글을 올렸다. 원래 내 사진에 달리던 것보다 두배로 많은 좋아요와 댓글을 받았다. 그런데 웬걸. 사람들의 반응이 예전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리느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풍경이, 알림을 확인하느라 대충 씹어삼켰던 샌드위치의 맛이 아쉽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인스타그램은 한 발 뒤로하고 덴마크에서의 시간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하고, 우리가 준비해 온 이야기와 음식을 소개하고, 눈길을 끄는 수첩 한 권을 사고, 순간의 풍경과 바람 소리를 기억하는 데에 집중했다. 모든 활동이 끝나고 돌이켜보니 천국의 알바 18기 4인 그리고 코판 사람들과 나누었던 유대감이, 우리의 프로젝트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모습이, 고민하다가 결국 사왔던 작은 수첩 한 권과 잔디에 누워 맞았던 바람의 감촉이 모두 생생한 추억으로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 내게 천국의 알바 18기 활동이 어땠냐고 물어보면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법석을 떨지도 않고, 정말 별로였다며 욕을 하지도 않고 그냥 무난하고 좋았다고 답할 것 같다. 이렇게 차분하게 돌이켜볼 수 있을만큼 2주 동안 매순간에 집중했고 최선을 다했으며, 그 결과에 스스로 만족한다는 뜻이다.




  골디락스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겠다. 생명체가 생겨나기에 딱 알맞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던 골디락스 행성 지구. 그런 지구에 생명체가 나타날 수 있도록 기여한 결정적인 원소가 바로 철(Fe)이다. 철은 액체와 고체 상태로 지구 중심부에 존재했고, 금속철 산화와 산화철 광물 덕분에 35억년 전 지구에는 원시 생명체가 등장하게 된다. 원시 생명체의 광합성 작용으로 지구는 산소가 풍부한 행성이 되었고, 늘어난 산소 농도에 적합하도록 생명체들이 진화를 거듭한 결과 지금과 같은 고등 생명체가 된 것이다.  


  나는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품은 골디락스 행성이다. 나의 행성은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여러 원소들이 지표면에 떨어져 결합과 생성의 과정을 거쳐왔지만, 이렇다할 생명체를 아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 ‘천국의 알바’라는 결정적 원소를 만나게 되었다. 천국의 알바 18기로 활동하는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하는 일’을 찾았고, 전혀 다른 생활 방식을 경험해봤으며, 남들의 평가와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당장은 이 경험이 가져오는 변화의 크기를 알아챌 수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나’라는 행성에 떨어진 ‘천국의 알바’라는 원소가 다양한 결합을 만들어냈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가능성이 무수히 생겨났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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