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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Aug 17. 2023

울고 넘는 박달재가 아니라, 울고 넘는 한라산(2)

2021년 3월 27일-그날, 안개 낀 516도로의 악몽

2021년 3월 27일-그날, 안개 낀 516도로의 악몽

이 글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ireundal/68


내가 한 달 살기를 하던 때는 제주도에 고사리 장마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제주도는 3월 말과 4월 초, 장마처럼 비가 자주 내리는데 한창 고사리가 자랄 때 찾아오는 비라서 고사리 장마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여름철 장마처럼 폭우가 쏟아지는 건 아니고, 짙은 안개를 동반한 빗줄기가 추적추적 내리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주의할 부분은 바로 저 '안개'다.


고사리 장마철에는 제주도, 그 중에서도 특히 한라산을 끼고 있는 중산간 도로 인근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곤 한다. 사실 제주도에서 지내기 전까지는 여행을 다니기 좋은 계절, 그러니까 잘해봤자 초여름~가을 정도에 자주 다니던 길이라 안개의 무서움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저 서울에 비하면 통행량 적고-아예 차가 없다시피 한 중산간 도로가 마냥 달리기 좋다며 좋아하기나 했지. 심지어 숲터널은 일부러 운전하러 몇 번이나 찾아가기도 한 내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머무르게 되면서, 궂은 날씨에도 운전을 해서 한라산을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생각이 크게 달라졌다. 급경사, 급커브 같은 것들만 문제는 아니었다. 흘러가는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로 자욱하게 낀 안개 뭉치 속을 달리다 보면 시계는 금세 망가진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3월 말 고사리 장마철의 중산간 도로-특히 516도로는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며 가끔은 눈물 나게 공포스럽다.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는 그 날짜는 3월 27일. 토요일이었고, 서울에서 E선배와 S가 놀러오기로 한 날이었다. 둘 다 나와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기자였기 때문에 휴일 맞춰잡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비행기편도 따로따로 예매, 오는 시간도 따로따로. 마중하러 나가는 나도 따로따로 두 번을 실어날라야 하는 상황. 그래도 겨우 보름 남짓 살면서도 서귀포↔제주공항 셔틀은 이미 이력이 났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먼저 도착하는 E선배 픽업을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때가 이미 늦은 오후였다.


E선배는 대략 5시 비행기로 출발해서 6시쯤 제주도에 떨어질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흥얼거리며 차를 끌고 나섰는데 날이 부쩍 흐려졌다는 걸 돈내코 입구를 지나 서성로에 진입하는 순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대로 1131번 지방도-그러니까 516도로를 타기 시작한 순간부터 악몽이 시작됐다.


아직 초입인데도 희뿌연 안개 때문에 시계가 급격히 축소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산길을 적당히 속력 높여 달리는 걸 좋아하는 철부지였는데 이 날씨에는 도저히 악셀을 밟을 수가 없었다. 내 앞을 추월해서 달리던 차가 속력을 낮추며 비상등을 켰고, 깜빡이며 점멸하는 비상등 불빛이 잠시 후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https://youtu.be/0Ejb4dCqSao

유튜브에서 가져온 안개 낀 날 516도로 주행 영상. 하지만 이것도 내가 달렸던 날보다는 훨씬 시야 확보가 잘되는 편이다ㅠ

설상가상으로, 내 허름한 2016년식 K5는 12만 킬로 이상을 달린 녀석답게 앞유리와 사이드미러의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아무리 닦아내도 이미 유막이 굳어져서 평소에도 야간주행을 할 때 시야 확보가 조금 어려운 편이었는데, 평소에는 그냥 조금 불편한 수준이었으나 이런 날씨에서는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 앞은 이미 안개로 희뿌옇고 사이드 미러는 안개+유막으로 인해 뒤에서 차가 오는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 백미러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도로의 차선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네비를 따라 시속 20km로 구불구불한 516도로를 달리는, 아니 주행하는 경험은 정말이지 악몽 같았다.


영화 <미스트>의 한 장면처럼 사위가 온통 안개로 가득하고, 앞뒤를 달리는 차들의 비상등 불빛은 잠시 명멸했다가 까무룩하니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반대 차선에서 내려오는 차들 역시 엉금엉금 거북이 속도로 비상등을 켜고 지나가는데, 멀찌감치서 비상등 두 개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바로 옆에 와서야 안개 사이로 차체가 잠깐 보였다가 사라지는 순간 느껴지는 공포감이란. '이러다 사고 나겠다'가 아니라, '사고 나면 백퍼 죽겠다' 같은 아찔한 감각에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울면서 찍었던 사진 한 장

겨우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안정을 되찾게 된 건 성판악 부근까지 와서였다. 올라올 길은 다 올라와서인지 안개가 조금 옅어지는 것도 같았고, 오히려 더 짙어지는 것도 같았다. 핸들은 이미 내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있었지만 중간에 잠시 멈춘다는 선택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한 번 멈추면 시동을 다시 못 걸 것 같았기에... 이제 하물며 내리막길 코스로 접어든다고 생각하니 정말 한없이 울고 싶었다. 


그래도 길은 계속되고 나는 가야만 했다. 식은땀과 반쯤 흘러나온 눈물로 찹찹해진 얼굴을 손등으로 대충 닦고 516도로를 마저 달렸다. 달리고 또 달리고, 아니, 달린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지. 그냥 주행했다. 내리막길에 행여라도 미끄러지거나 안개로 인해 커브길을 돌다가 잘못 들이박는 일이 없도록 브레이크를 엄청나게 힘주면서 밟느라 오른쪽 허벅지에 경련이 올 정도로. 


체감상 3시간은 훌쩍 지난 것 같았다. 안개 밖의 세상은 이미 아주 깜깜하고 어두운 한밤 중일 것만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그때, <미스트>의 인물들이 느꼈을 공포를 온전히 추체험할 수 있었다. 안개 속에서 쉼없이 차를 몬 결과, 나는 안개 속이 너무나 무섭지만 역으로 안개 밖에 존재하고 있을 것들 역시 한없이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이 안개를 넘어서면 그 바깥 세상에는 어떤 끔찍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을까, 그런 비이성적인 공포에 사로잡혀있을 때 갑자기 안개가 걷혔다. 어느 순간 내리막길이 끝나고, 삼미목장 지나 첨단과학기술단지입구 교차로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주국제대 쪽 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려 담배를 피웠다. 식은땀으로 흥건한 손에는 아직까지도 긴장이 남아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피우는 담배는 왜 그리도 꿀맛 같은지. 너무 긴장해서 이를 꽉 깨물다보니 하악이 얼얼한 느낌이었다. 겨우 안정을 찾고 운전석에서 핸드폰을 꺼내 네비 대신 카톡을 확인할 여유도 생겼다. 악랄한 기상상황 때문에 E선배의 비행기도 출발이 지연돼 좀 늦을 것 같다는 카톡이 와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내가 서귀포에서 출발했을 때부터 계산해 1시간 30여분이 지난 6시 20분 정도에 불과했다. 체감상은 벌써 저녁 9시에 가까워진 것 같았는데.


아라동으로 들어가기 전, 겨우 정차하고 한숨을 돌리며 봤던 축축한 벚꽃의 풍경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도로를 바라보았다. 고사리 장마가 이리저리 흔들고 지나가 꽃잎은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지만, 내가 무척 좋아하는 제주국제대의 벚꽃길이 빗물에 젖어 반들거리는 그 풍경이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았다. 아마 나는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오늘이 이 체험이, 이 감각이, 그리고 이 풍경이, 경험이, 아주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운전을 아주... 아주, 조심히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도 함께 남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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