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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Jan 24. 2024

꿈의 무게를 짊어지고 노래하라

뮤지컬 <일 테노레>

* 스포일러 없습니다.

서울자치신문 공연 섹션에 기고한 리뷰(원문 링크)입니다.

오디컴퍼니 제공

21g 실험이라는 게 있다. 1907년, 미국의 의사 던컨 맥두걸이 임종을 앞둔 6명의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질량 변화 측정 실험이다. 실험 결과, 맥두걸은 6명의 피실험자 중 한 명이 죽은 후 약 21g의 무게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21g이 인간이 죽은 뒤 사라지는 영혼의 무게라는 것이다. 실험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 기묘한 실험에서 시작된 ‘영혼의 무게는 21g’설은 아직까지도 영화나 향수 상표 등, 꽤 많은 곳에서 매력적인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만약 영혼의 무게가 정말로 21g이라면, 꿈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꿈의 무게를 직접 재어볼 수는 없어도 가늠해 볼 수는 있다. 뮤지컬 ‘일 테노레’(오디컴퍼니㈜ 제작)의 서사를 관통하는 인물들의 꿈을 통해서. '일 테노레'는 조선 최초의 오페라 테너 이인선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캐릭터 윤이선(홍광호·박은태·서경수)을 중심으로, 항일운동 모임인 대학생 연극회 ‘문학회’ 단원 서진연(김지현·박지연·홍지희), 이수한(전재홍·신성민)이 ‘조선 최초 오페라 공연’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오디컴퍼니 제공


완벽했던 죽은 형의 그림자 아래 숨죽이고 살아가던 의대생 윤이선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조선의 얼을 지키기 위해 연극을 만들던 대학생 모임 ‘문학회’에 가입한다. 이 과정에서 윤이선은 우연히 들은 오페라 아리아에 이끌려 자신의 재능을 찾아내고, 서진연과 이수한은 학생 공연이 전면 금지되는 상황을 맞아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윤이선과 함께 ‘조선 최초 오페라 공연’에 도전한다는 내용이다.


시놉시스와 ‘조선 최초 오페라 테너’라는 문구는 이 극을 윤이선의 성공담에 관한 이야기로 느껴지게 한다. 윤이선이 친구들과 함께 일제 강점기, 열악한 상황 속에서 좌충우돌 우여곡절 끝에 오페라를 올리고, 성공적으로 미국 뉴욕 오페라단에 입단하는 줄거리가 머릿속에 자동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일 테노레’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이 극은 윤이선이 성공으로 향하는 여정을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조선 최초 오페라 테너’라는 수식어를 보고, 매끄럽게 잘 빠진 위인전 같은 성공담을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이선의 성공담 대신, 170분(인터미션 20분 포함) 동안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우리는 그와 그의 친구들이 꾼 ‘꿈의 무게’에 빠져들게 된다. 


나라를 잃은 서러운 시대, 거시적인 환난의 시대 속에서도 누구나 꿈을 꾼다. 어떤 꿈은 사뭇 비장하고 대의를 위해 잘 벼려진 검처럼 날카롭다. 어떤 꿈은 한없이 소박하고, 또 어떤 꿈은 이런 험난한 시대에 꿈꾸기엔 사치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히 개인적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이상 누구나, 어떤 시대를 살고 있더라도 꿈꿀 자유는 존재한다. 꿈의 무게는 오롯이 자신이 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오디컴퍼니 제공


제목인 ‘일 테노레’는 이탈리아어로 테너를 뜻한다, 윤이선에게 오페라를 가르친 베커 선생님은 ‘오페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 테노레’라고 하고, 진연은 이선을 ‘나의 일 테노레’라고 부른다. 윤이선의 ‘조선 최초 오페라 테너’ 성공담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 극에서, ‘일 테노레’가 이토록이나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일 테노레’라는 단어 자체가 극에 등장하는 모두가 각자 꾸는 ‘꿈’의 대유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전까지 한 번도 발음해본 적 없는 낯선 외국어 단어, 꿈꿔본 적 없는 오페라 가수의 길, 노인이 될 때까지 함께 하는 사랑,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독립에의 희망. ‘일 테노레’는 곧 그들이 바랐던 그 모든 꿈이다. 원하던 꿈을 이루고도 회한 가득한 목소리로 ‘객석의 유령들’에게 말을 걸던 윤이선, 2막 마지막 넘버, ‘피날레-꿈의 무게’를 부르고 핀 조명을 받는 그의 뒷모습이 짙은 여운을 남기는 까닭이다. 


‘조선 최초 오페라 테너’의 명성에 걸맞게 극 중 내내 폭발적인 가창력을 선보여야 하는 윤이선 역 배우들의 맹활약이 도드라진다. 또한 서사의 중심에 서서 극을 이끌어가는 서진연 역 배우들의 열연이 인상 깊다. 


오페라가 주 소재인 만큼, 오페라와 뮤지컬의 음악적 요소들을 절묘하게 더한 음악도 ‘일 테노레’의 큰 매력이다. 소위 말하는 ‘킬링 넘버’는 아니지만, 윌 애런슨이 직접 작곡한 넘버들과 가상의 오페라 ‘꿈꾸는 자들(I Sognatori)’ 아리아가 18인조 오케스트라와 함께 어우러져 일으키는 다채로운 변주는 놓치기 아까운 관극 포인트다. 뮤지컬 ‘일 테노레’는 오는 2월 25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상연된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드라마(러브 스토리 포함)를 좋아하는 분

★★ 꿈을 좇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약한 분

★★ 도파민 과다, 자극적인 극보다 잔잔한 극을 좋아하는 분

★ 독립 운동 소재 창작물은 놓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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