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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Mar 15. 2024

우리에게도 아직, 피화당이 필요합니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

* 스포일러 없습니다.

서울자치신문 공연 섹션에 기고한 리뷰(원문 링크)입니다.


홍컴퍼니 제공

피화당(避禍堂). 글자 그대로 ‘화를 피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장소이자, 90분의 시간 동안 관객인 우리가 그들의 울분에 공감하며 세상의 ‘화’를 피하는 그 순간 자체이기도 하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제작 ㈜홍컴퍼니, 프로듀서 홍승희)은 고전소설 ‘박씨전’을 모티브로 17세기, 병자호란 직후 조선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동굴로 숨어든 세 여성, 가은비(최수진)와 매화(정다예), 계화(백예은)은 그곳을 피화당이라 이름짓고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소설을 써서 저잣거리에 내다 팔고, 삯빨래를 하며 발버둥친다. 


이들은 어떤 ‘화’를 피해 동굴에 숨은 걸까. 그 답은 후량(조풍래)과 강아지(이찬렬)이 나누는 대화를 타고 흘러든다. 병자호란 직후의 조선, 삼전도의 굴욕과 끌려갔던 여인들의 이야기. 가은비와 매화, 계화는 청으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경멸의 시선을 받고 자결하라는 강압에 시달리는 ‘환향녀’다.


가은비와 매화, 계화의 죄는 여자였던 것, 그리고 살아남은 것뿐이다. 그저 전쟁이라는 거대한 재앙에 휩쓸렸을 뿐인데도 모든 죄는 살아남은 자의 몫으로 돌아온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불행한 삶, 그럼에도 피화당의 여성들은 살아있고, 서로 연대하며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병자호란 당시 강화 협상을 주장했던 최명길의 양자인 선비 후량이 글 솜씨가 뛰어난 이름 없는 작가 가은비에게 소설을 의뢰하기 위해 피화당을 찾는다. 


홍컴퍼니 제공


“죽어가는 백성들보다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는 사대부를 비웃는 글을 써주시오.”


후량의 제안에 고심하던 가은비가 제안을 승낙하면서, 극은 ‘박씨전’을 매개로 크게 요동친다.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 ‘박씨전’은 누가 쓴 것일까, 라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한 극답게 극 내에서 박씨전의 비중은 꽤 큰 편이다. 가면을 쓰고 부채를 휘두르며 박씨전의 서사를 읊어나가는 피화당의 여성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관극의 가치가 있다.


다루고 있는 역사적 사건, 그리고 명백한 피해자임에도 숨어 살아야만 했던 서글픈 환향녀들의 상처가 극 전반에 무겁게 깔려있다. 하지만 ‘여기, 피화당’은 마냥 슬프고 어둡기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고통스러운 삶,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도 희망은 언제나 한 줄기 불꽃처럼 피어오른다. 그리고 피화당의 세 여성이 보여주는 연대는 그 가녀린 불꽃을 꺼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힘이다. 처음에는 가은비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두 함께 부르는 넘버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의 가사처럼 말이다.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 / 세상에 남겨질 수 있을까 /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 /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노래하던 이들의 목소리는 점차 욕망과 희망을 담아 변화한다.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 / 세상에 남겨질 수 있다면 /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 /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짓지 않은 죄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죽여 지내면서도, 피화당의 여성들은 ‘세상에 남겨질 이야기를 쓰고,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바람을 갖는다. 희망은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우리의 마지막 재산이며 버팀목이다. 21세기 한국,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아직 피화당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여기, 피화당’은 오는 4월 14일까지 플러스씨어터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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