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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식이 Nov 15. 2017

Thanks for saying that.

우리집 유행어 탄생기

우리집에선 항상 유행어가 있었다. 식구라고는 꼴랑 세명이지만, 그 때 그 때의 유행어가 있어서 우리끼린 그것을 생성하고 유통시키고 소비하는데 꽤 즐거움을 느끼고는 했다. 주로 아빠가 어떠한 이상한 말을 시작하고- 티비에서 본 것을 따라한다거나, 이상한 말투를 자꾸 반복해 함- 엄마가 그것을 유통시켰다. 

예를 들어 뒷산에 자주 올라가시는 아빠가 산에서는 모르는 사람과도 지나치면 인사를 한다며 그럴 땐 '안녕하세요오~' 하는 특유의 말투가 있다고 해 우리는 그 도도도도레~ 같은 특유의 음을 따라하며 매일 웃어댔다. 엄마랑 내가 방에서 문 닫고 소곤소곤 얘기를 하고 있으면, 그 사이에 끼고 싶은 아빠가 마치 누가 불렀다는 듯, 방문을 살포시 열며 왜애? 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우리는 지금도 이따금 아무 이유없이 왜애? 하는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전화를 걸어서도 느닷없이 왜애? 하면서 말을 걸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웃는다.




Thanks for saying that.

  

엄마랑 아빠가 캐나다에 왔다가 두달여를 지내고 한국으로 돌아가신지 얼추 한달 정도가 되었다.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에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고, 특히 부모님과 남자친구 사이에 여러가지 생각지도 못 했던 에피소드 들이 많았다. 뭐 여기에 일일히 다 써내려갈 수는 없지만 나에겐 심히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도 한 시간이었다. 워낙에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 갑자기 밀어넣어져 "자 지금부터 우리는 가족이다. 친해진다. 시작!" 이라는 느낌으로,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걸 반 강제적으로 공유하게 되었으니, 서로 아무리 잘 하려고 노력해도 불안불안 삐걱대는 느낌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한국말이라고는 반찬, 엉덩이, 된장, 추워, 안녕, 생일 추카해 정도밖에 모르는 남자친구와 영어라고는 땡큐~, 쏘리, 하이~, 바이~ 밖에 모르는 우리 엄마아빠 사이에 점점 알 수 없는 찌릿찌릿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화가 안되니 서로의 얼굴밖에 안 보이는데 자꾸 서로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읽히니 더욱 묘해지지 않았나 싶다. 우리 엄마아빠의 불만은 역시 '왜 빨리 결혼발표를 안하나.' 였고(사실 그거 하나 보고 오신 분들이라. 휴가니 뭐니 갖다 붙여도 역시 이번 여행의 목적은 우리 딸의 약혼 성사 및 상대 가족과의 만남 aka 상견례), 정말 세상 착하지만 꽃같이 예민한 내 남친의 불만은 불만 of 불만 '욕구불만'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텐션에 맞춰 칼춤을 춰대는 심정이었던 나는 다같이 가족 여행을 제안했고(멍청이!) 그것은 그날 오전 갑자기 타이어-한 달 전에 교체한-에 빵꾸가 나 신경이 날카롭던 남친에게 왕복 9시간의 운전을 요하는 것이었으며(등신!!), 그 날은 정말 나를 엿먹이려고 신이 작정을 한 듯 날씨마저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 닥치고 온도가 바닥을 치는 등 그 여행지의 모든 아웃도어 액티비티가 취소가 되기까지 했다. 날씨도 체크 안한 내 탓이었다. (바보냐?) 그뿐이랴, 그날 밤 나는 술을 마시고 울며불며 엄마아아 내가아아아 멀리 살아서어ㅓ어 효도도 못하고오오오 하는 주사를 부렸으며, 그 이틑날은 아침부터 남친의 핸드폰이 갑자기 전원이 나가버리더니 그대로 죽어버렸다. 정말 망해라 망해라 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 전보다 더 기분이 안 좋아진 채로, 돈은 돈대로 쓰고, 기운은 기운대로 빠져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의 토버모리. 사진은 몇 년 전에 남친과 둘이 갔을 때 날씨 화창한 날 찍은 사진들이다. 이랬어야 되는데!!! 흐규흐규






정말 힘들었을텐데도 엄마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된장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쳐서 저녁을 준비해 주셨다. 남자친구는 정말 한국 음식을 잘 먹는데 그것은 우리 부모님이 그를 예쁘게 보시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이다. (다른 이유들 중 이유 1. 머리숱이 많다. 이유 2. 매우 뚱뚱하지 않다. 이유 3. 딸보다 어리다- 왠지 위너의 느낌인가. 이유 4. 잘 생겼.....냐? 확실하냐?) 별 말 없이 꼭꼭 밥을 먹던 우리는 맛있다 엄마, 국이 시원하네 등등의 말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는 남친이 LCBO에서 사온 한국 빨간 뚜껑 소주를 깠다. 큰 댓병으로 일반 소주 두병보다 좀 더 큰 사이즈 정도였는데 한 25불 정도 했던것 같았다. 그러면서 엄마가 "데이브가 이렇게 엄마아빠(주로 마시는 건 엄마이지만) 생각해서 술 안 떨어지게 매번 챙겨주고 그런 마음이 되게 고마워." 라고 말했다. 전해주니 남친이 "Thanks for saying that." 이라고 말했고 엄마에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대. 라고 하자 뭔가 색다른 표현의 그 말이 좋았던지 엄마는 환하게 웃었다. 

잠시 뒤 남친이 고사리 나물을 먹으며 이거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있겠냐? 라고 대답해 줬다. 그러자 그는 그럼 엄마한테 배워봐. 나 이거 좋아. 맛있어. 라고 말했다. 엄마는 나에게 읊조리듯, "뭐라고 그러는지 빼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해"라고 협박해 왔다. 내가 엄마꺼 고사리 맛있다고 엄마한테 배우래. 라고 말하자 엄마는 씨익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어쨌든 남친은 우리 부모님께 한글로 꼭꼭 눌러 쓴 편지를 드리며 결혼을 허락해 주세요 하는 간지러운 이벤트를 벌였고, 나에게 프로포즈를 했으며 우리는 새벽 2시에 함께 샴페인을 터뜨렸다. 부모님은 이제 우리는 아무 욕심이 없다. 그런데 애는 빨리 낳아야지 라는 모순된 말을 남기고 출국을 하셨다. 돌아가셔서 너무 마음이 외롭지 않으실까 걱정하는 내게 너희를 못 보는 건 서운하지만, 그래도 내 집이 편하다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뭔가 '행복한 왼쪽'같은 느낌의 남자친구를 보며 그 때는 참 다들 힘들었겠구나. 내가 나 마음 편하자고 부모님을 이 좁은 집으로 모셔서 다들 참 마음 고생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우리 참 잘 해냈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 이 다음에 오면 꼭 더 넓은 집에 모실게. 라고 하면 엄마는 또 신이 난 목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그렇게 말 해줘서 고마워."라고. 





오늘 나를 피워 낸 말.

그렇게 말 해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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