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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Apr 28. 2021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그리고 책 속의 음악

하루키를 향한 나의 러브레터, 그리고 비틀스와 도어스의 음악




The Beatles - Norwegian Wood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기체가 두꺼운 비구름을 뚫고 함부르크 공항에 내리려던 참이었다. 11월의 차가운 비가 대지를 어둡게 적시고, 비옷을 입은 정비사들, 밋밋한 공항 건물 위에 걸린 깃발, BMW 광고판, 그 모든 것이 플랑드르파의 음울한 그림 배경처럼 보였다. 이런, 또 독일이군.
비행기가 멈춰 서자 금연 사인이 꺼지고 천장 스피커에서 나지막이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 (Norwegian Wood)] 그리고 그 멜로디는 늘 그랬듯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숨죽이며 낯선 서른일곱 살 남자(와타나베)의 비행을 지켜본다. 소설 노르웨이의 숲 첫 페이지부터 흘러나오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비틀스의 음악을 들으며 커온 나는 단숨에 이 책에 빠져들 것을 예감했고 이 첫 페이지를 몇십 년이고 반복해서 읽어왔다. 책 속에서는 와타나베에게 괜찮냐고 묻던 스튜어디스가 가버리자마자 비행기 안 음악은 빌리 조엘의 곡으로 바뀌었지만 나는 이 첫 페이지에 매혹돼 마지막 페이지가 끝날 때까지 음울하고 진한 노르웨이의 숲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 · The Beatles



나라는 사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깊이 사랑할 순 있지만 오랜 시간 품지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나에게 가장 오래된 것은 무엇일까? 어느 날 불현듯 한 궁금증에 나를 거꾸로 매달아 탈탈 털어보니 내 품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며 '무라카미 하루키'란 사람이 툭 하고 떨어졌다. 

15살의 나는 책 대여점에서 처음 낡고 닳고 사람들의 손때가 가득한 무라카미 하루키 씨와 조우했다. <상실의 시대>와 <댄스 댄스 댄스>, 그리고 <태엽 감는 새>. 이 책들은 내 15세 인생에 있어 가장 강렬하고 날카로운 책들이자 꽤나 어른스럽고 조금 외설적인 단어들의 신세계였다. 

영화와 책, 소설을 습관처럼 즐겨 보긴 했지만 그 시절 15살의 나는 내게 어떠한 장르가 잘 맞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무취향의 소녀였다. 하지만 하루키의 책을 연이어 읽어낸 후 침대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아! 난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내가 지금 것 읽어온 그 어떤 책보다도 독특했다. 무엇보다 구체적인 제품의 브랜드, 아티스트의 이름, 곡 제목을 열거하는 그의 글쓰기 스타일은 현대문명을 처음 맞이한 듯한 신선함과 세련됨이 물밀듯 밀려왔다. 

차가운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현대적인 삶을 드라이하게 촬영한 다큐멘터리처럼, 혹은 세밀하게 그려낸 하이퍼 리얼리즘 작품처럼 한 올 한 올 적어가는 그의 섬세한 문체가 나는 참 좋았다. 이러한 스타일은 80~90년 당시의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의 젊은 신진 작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부터 소설 작품에서 특정 브랜드들이 CF의 한 장면처럼 언급되고 묘사됐고, 이 것은 TV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 광고들이 흘러나오듯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로 자리 잡았다. 


나에게 영향을 끼진 그의 많은 특성 가운데서도 나를 가장 변화시키고 사로잡은 건 그의 음악 취향이었다. 특정 아티스트의 이름과 곡을 언급하는 것을 넘어 소설 속 캐릭터들이 아티스트의 히스토리와 자신이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하루키 월드. 특히 올드팝, 재즈, 클래식 장르의 경우 그저 잘 아는 수준을 넘어 전문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그의 음악 수다가 시작되면 나는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붙잡는다.

일 전 하루키와 함께 책을 내기도 한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는 그런 하루키의 음악적 지식에 감탄하며 '하루키 씨는 하루는 클래식 음악회를 가고 다음날은 재즈 라이브를, 집에서는 팝 레코드를 듣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긴, 재즈바 '피터캣'을 직접 운영했던 그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그의 음악 사랑은 내가 예상하는 깊이와 무게, 그 이상일 것이다. 


하루키의 음악 사랑은 그의 귀와 손을 통해 명곡에 어울리는 명작의 제목으로도 재탄생되기도 했다. 비틀스의 Norweigan wood는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로, 냇 킹 콜 South of border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으로, 커티스 플러 Five Spot After Dark는 '어둠의 저편'이란 근사한 소설이 됐다.  

찰리 파커, 빌리 홀리데이, 야나체크, 슈바르츠코프, 빌 에반스, 밥 딜런, 딥 퍼플, 도어스, 아마 A4 한 페이지에 쉼 없이 적어내려도 다 적지 못할 만큼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속에 등장한다. 

하루키의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언제나 이번엔 어떤 아티스트가 나올까? 란 기대감에 부풀었고, 내가 알거나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그 페이지가 외워질 정도로 입가에 그 문장들을 머금곤 했다. 새로운 곡을 발견할 때면 그 페이지를 살짝 접어두었다가 틈틈이 곡을 찾아들었다. 그리곤 그 책을 끝마친 순간 다시 그 접힌 페이지를 열어 음악과 함께 문장을 꼭꼭 씹어 삼키곤 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자분을 먹고 자라나 조금의 냉소와 낭만을 불균형적으로 간직한 어른이다. 지금의 내가 좋아하는 것, 취향과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이 순간 내가 생업으로 행하는 일까지. 그의 책에 소개된 작가들, 책들, 그리고 수많은 뮤지션들을 한 장 한 장 온몸에 필사해 새겨가며 세월을 보낸 나는 어느덧 30대의 <하루키스트 Harukist: 무라카미 하루키의 열성 독자>이자 음악업계에 종사하는 어른이 됐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없었다면 나에게 에스프레소처럼 딥한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지금처럼 행복하게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까?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먹구름처럼 흐릿한 존재감으로 비처럼 어디든 특색 없이 흘러내리고 젖어가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성격과 생각을 찾아볼 수 없는, 낯설고 완벽하게 다른 물성의 외계인 같은 내가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 


문토에서 음악에 관한 모임을 만들어보자는 연락이 왔을 때 하루키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문토 <디어 마이 뮤직> 모임을 위해 커리큘럼을 짜다 보니 내가 하루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분야인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히 이러한 음악 취향을 만들어준 하루키의 이야기가 처음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의 첫 하루키의 책인 <노르웨이의 숲>으로 시작해야만 했다. 

소설 노르웨이 숲에는 나오코가 매우 좋아하는 브람스부터 빌 에반스더 도어스, 빅하우스, 헨리 맨시니, 존 콜트레인, 드뷔시 등의 다양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또한 여성 캐릭터들인 레이코와 미도리가 기타를 치며 부르던 피터 폴&마리, 비틀스, 킹스턴 트리오의 곡들이 주크박스처럼 이어진다. 정말로 많은 곡들이 소설에 등장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듯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 (Norwegian Wood)을 빼놓고 절대로 그 어떤 이야기도 시작할 수 없다. 나의 하루키를 향한 존경과 사랑도 노르웨이의 숲 속에서 그 환상적인 여정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책 한권만 해도 이렇게 많은 곡들이 흘러나오기에, 앞으로 천천히 조금씩 나의 글을 읽는 당신들께 그의 책 속의 음악들을 들려주고 싶다. 


물론 하루키가 모두의 마음에 들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루키스트를 자처하는 나도 최근엔 그의 작품이 조금 진부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게 실제로 모든 독자에게 재미가 없었던 것인지, 그 책을 읽던 순간의 나의 상황과 가치관에 맞지 않았는지, 어느덧  내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알 순 없다. 그와 맞지 않다고 느끼는 '기준'조차 언젠가의 그에게서 온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하루키를 싫어하고 크게 실망하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다. 


짐 모리슨이 죽고 나서 10년 이상이 지났지만 도어즈의 음악을 틀면서 달리고 있는 택시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것이다.

'세계의 끝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변하지 않는 것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루키의 책 속 구절처럼 내 세계의 일부는 세월 속에 조금씩 퇴색되거나 조금 다른 방향으로 길이 빗겨 났을 것이고, 일부는 여전히 변치 않고 그를 사랑하고 따르고 있을 것이다. 상실의 시대 이후 그의 작품 속 캐릭터들이 각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조금은 성장하거나 퇴보하거나 빗겨 난 성격을 가지듯, 그저 나의 삶도 취향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아직 취향이 없다면 없는 대로, 있다면 있는 대로 나와 함께 그를 만나서 자신의 음악 취향을 돌아봤으면, 혹은 만들어갔으면 한다. 


글을 마치며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짐 모리슨, 도어스의 노래를 언급한 부분을 전한다. 낯선 장소,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도 나는 언제나 그의 문장에서 배웠기에. 


The Doors - People Are Strange
“내가 태어나 처음 키스를 한 와타나베라는 남자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쉰여덟 살이 된 지금은, 하고 말이지. 어때, 멋있다고 생각되지 않아?”
“멋있을 거야.” 하고 나는 피스타치오 껍질을 벗기면서 말했다. 
“저기, 왜 그렇게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다시 한번 묻는 거지만.”
“아마 이 세상에 아직 잘 정응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 거야.” 하고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어쩐지 이곳이 현실 세계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 사람들도, 풍경도, 어쩐지 현실같이 안 보인단 말이야.”
미도리는 카운터에 한쪽 팔로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짐 모리슨의 노래에 그런 게 분명히 있었어.”
“People are strange when you are a stranger (낯선 곳에 가면 사람들이 낯설게 보여요).” 
“피스 peace.”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PS. 노르웨이의 숲 전반부, 와타나베의 기숙사 룸메이트이자 아침마다 라디오체조를 하는 돌격대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그 친구는 기숙사 벽에 운하 사진을 붙여 놓는데 와타나베는 그 운하 사진을 떼고 짐 모리슨의 사진을 붙여 놓는다. 또한 미도리가 와타나베를 향한 관심과 사랑을 표할 때 나왔던 음악도 도어스(The doors)다. 


The Doors - People Are Strange








밤에 낭만을 입히고 낮에 설렘을 더하는 방법,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요즘 읽는 책에 언급된 생소한 노래 제목, 오래전 홀로 영화관에서 본 영화 속 낯선 음률, 평범한 식사 시간이나 침대 위 노곤한 시간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BGM. 이처럼 우리 삶을 따스히 맴도는 다정한 음악만으로도 충분하죠. 
음악에 얽힌 추억, 음악을 들었을 때의 감정, 음악에 대한 생각을 적어갑니다. 
음악에서 시작해 책과 영화를 거쳐 각자의 경험을 지나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는 여정, 함께 하시겠어요?  <디어 마이 뮤직> 


*제가 리더로 진행하고 있는 영화, 책 속 음악 모임 '디어 마이 뮤직'의 커리큘럼으로 소개했던 내용들과 모임 때 설명했던 내용들을 바탕으로 글을 써 내려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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