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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 Sep 30. 2015

택배여 총알을 타고 오라

#광고와 인생 / 혹은 아주 멀리 돌아오기를...

   애당초 주문을 했다는 걸 알려준 게 잘못이었다.

   아이들은 장난감이 언제쯤 배송되는지 5분에 한 번씩 묻기 시작했다. '오늘' 혹은 '내일'처럼 일(日) 단위로 알려달라는 차원이 아니다. 학원에 다녀오면 도착하는지, 저녁을 먹고 나서 도착하는지를 캐묻고 있는 것이었다. 비밀리에 주문할 걸.. 매번 후회하면서도 또 입방정을 떨었다. 아빠로서 '돈을 지불하고 너희, 나의 자식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는 티를 내고 싶은 것이었겠으나 결과는 고장난 라디오를 양쪽 귀에 매단 꼴이 됐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혀를 끌끌 차며 동네 바보형 바라보듯이 나를 쳐다본다.



   아이들은 물어도 물어도 마땅한 대답을 듣지 못할 때면 다른 질문으로 변화를 준다.

   - 아빠, 어느 회사 택배로 와? 우체국이야? 로젠이야?

   그러고는 확인해준 택배 트럭이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는지 창밖을 연신 기웃거린다. 택배회사들에 대한 비교평가와 질타에 더해 우리 동네의 지정학적 위치까지 불만스러워한다. 어느 동네보다, 어느 회사보다 빠르게 띵동을 눌러줘야 한다는 거다. 주문과 어린이 불만처리 서비스는 오로지 나의 몫이어서 집에 있을 때는 귀에다 대고, 일하러 나갔을 때는 수시로 내게 전화를 걸어 상세한 정보공개를 요구한다. 이쯤되면 나는 아빠가 아니라 콜센터 직원일 따름이다.  아... 다시 한 번, 온라인 주문 사실은 19금으로 처리했어야 하는 거다. 그거슨 어른들의 세계여야 했던 거다.



   DHL의 시리즈 광고는 카피 하나 덧붙일 필요 없이 자신들이 매우 빨리 배송한다고 자랑질하는 광고다.

   이 시리즈 뿐만 아니라 최근(수 년? 십수 년?)의 거의 모든 광고를 도배하다시피 '어쨌든 내가 제일 빨라'는 이 회사의 유구한 광고 컨셉트다. 매우 독창적이고 재미 있고 그래서 대개는 상도 받고 박수도 받는 광고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특히 비교광고를 할 경우엔 애들이 서로 잘났다고 싸울 때 흔히 쓰는 치사한 수법도 많이 쓴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상대방의 자랑과 과시가 다 끝나고 '난 그보다 더'라는 한마디로 열받게 한다든가 상대방이 한참 욕을 하고 나면 다 듣고 있다가 짧게 한 마디, "반사" 하는 식. (그런 종류의 광고는 다음에 다시 음미해보도록 하고...) 아무튼 이 광고는 비교광고는 아니고 순수하게 '우리 배송직원은 총알타고 다녀' 계열이다.


   굳이 딴지를 걸자면

   그 자랑, 우리 애들 앞에서도 한 번 해보시지...

   하고 싶지만 현실세계와 분리해 '컨셉-표현'으로만 보면 심플하고 뷰리플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카피가 없으니 카피 설명도 필요 없고, 이미지는...

   보시다시피 판매자가 테이핑을 끝내기도 전에 당신이 뜯어 볼 수 있을 정도의 초특급 배송이라는 주장. '머리에 피도 안 마른...'이나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과는 별 상관 없지만 굳이 한국식 카피를 붙이자면 '테이프 접착제 마를 새도 없이 당신께 전해집니다' 정도가 될라나? ^^;;




   시작과 끝을 하나의 시공간에 표현한 것이 크리에이티브의 핵심이랄 수 있겠는데 이 광고를 보면서 나는 뜬금없이 예전에 읽었던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가 생각났다. 첫 챕터 제목이 <끝머리의 시작>이고 마지막 챕터 제목이 <시작의 끝머리>였던 게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첫 장의 제목에 '끝'이라는 단어가 있고, 마지막 장에 '시작'이 있어서 상당히 독특하고 아이디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광고의 어느 부분이 천국의 열쇠와 연결되는 걸까? 판매자의 테이핑이 책의 챕터처럼 the beginning of the end가 되고 구매자의 개봉이 the end of the beginning이 되서 그런가...




   배송이 빨라야 아이들의 등쌀에서 벗어나 내가 좀 살겠고, 내가 뭔가를 주문할 때도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의 기분이긴 하지만... 모 피자 브랜드가 30분 배달보증 서비스를 폐지했을 때 느꼈던 안도감도 새삼 떠올려 본다. 바이럴 캠페인으로 택배기사들의 노고를 위로한 것도 있듯이, 그깟 물건 따위의 전달에 속도경쟁을 벌이면서 인간을 위험하게 하고 생명을 단축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기 때문이다. 박스 하나에 고작 7~800원 정도의 순이익이 택배기사에게 돌아간다고 하니, 그 또한 통탄스러운 일.


   오래... 먼 길을 달려와줬구나...

   여러 사람의 작은 정성을 거쳐서 나한테까지 왔구나...

   이걸 보낼 즈음엔 난 다른 일을 하고 있었지.

   그때 나 대신 나를 생각해줬구나...

   기대하던 마음도 사그라들었는데 결국은 와 줬구나...

   이런 느낌을 주는 느릿한 택배가 있다면 어떨까? 그런 느릿한 택배가 '압축할수록 좋은 게 시간'이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몰아치는 현대기술문명에서 벗어나 '조금은 늘어나도 좋은 시간'을 대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더구나 그런 느릿함이 땀을 흘린 이들에게 제값을 치르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나는 아이들의 고문도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한가위 연휴라는 무시무시한 택배 공백기간도 버텨내지 않았는가? - 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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