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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Nov 17. 2022

합주의 기쁨과 슬픔

처음부터 합주의 맛을 알아버려서일까. 여전히 혼자 쳐서는 흥이 잘 나지 않는다. 내게 드럼의 즐거움은 합주의 즐거움과 같다.

나 혼자 해서는 절대 완성할 수 없지만, 개인 연습 없이는 의미가 없는 것.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곡을 함께 정하고, 잘하든 못하든 비슷한 수준의 개인 역량을 갖춰야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한 곡을 완성할 때의 기쁨!

구성원 각자의 역할이 뚜렷하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같이 해야 완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책을 만들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드는데, 친구들은 조금 변태 같다고 한다.


드럼을 치며 함께 사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배운다. 혼자 살 수 없기에 사는 건 크고 작은 합주를 하는 것과 같다. 오랫동안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도 결과‘가’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드럼만은 예외다. 연습실에서 합주하는 동안 합이 꼭 맞는 순간이 오면 지금이 무대 위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 공연에서 틀리고 말고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스키를 더 잘 타게 될 때, 나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 거대한 산의 눈곱만한 일부가 되어 스키 위의 자유를 누리는 만큼, 다른 모든 일이 결국은 별것 아니라는 마음이 된다.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이 되고, 작은 일에도 흥이 난다. (…) 좋은 삶이 무엇인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스키가 잘될 때, 스키가 내게 마지막 비빌 언덕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것만으로 좋으니 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 다른 모든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 잠깐이나마 그런 넉넉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넉넉한 마음이 들 때의 나를 나는 좋아한다.”

- 제현주, 《일하는 마음》, 어크로스, 2018, 112쪽     


‘스키’ 자리에 ‘드럼’을 넣어 읽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난히 일이 고된 날, 일이 합주라고 생각해본다. 사무실은 합주실, 혼자 하는 일은 악보를 외우고 몸에 익히는 개인 연습, 다른 사람들과의 협업을 합주라고 생각하면 솟아오르던 분노를 조금 누그러트리고 일이 되게끔 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혹시나 일이 잘 안되더라도 툭툭 털고 넘어갈 수 있다.


갈수록 친구들과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 다 같이 모일 시간도 없고 따로 연습할 시간은 더더욱 없으니 합주는 꿈도 못 꾸고, 어쩌다 시간 맞는 몇몇이 모여 맛있는 거 먹으며 수다 떠는 게 전부다. 드럼은 특히나 악기가 없으니, 합주할 때가 아니면 혼자 연습하기가 어렵다. 스틱에 먼지가 쌓이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다. 그래도 가끔 생각한다. 죽기 전 머릿속에 떠오를 몇 안 되는 장면 중에는 분명 컴컴한 합주실에서 드럼을 치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드럼은 수줍은 얼굴 뒤에 숨겨둔 사랑과 열정을 기꺼이 터트리게 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드럼 세트 위에 앉아 있을 때의 나는 좀처럼 부끄러움을 모르고,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온전한 기쁨을 누린다. 이렇게 간간이, 몸이 잊지 않을 정도로 한 번씩 합주를 하면서 늙어 가면 좋겠다.



다시, 결혼에 대한 로망이 있다. 정확히는 결혼식에 대한 로망. 아들 결혼식은 너무 구체적이고, 손주가 있다면 그 애 결혼식에 곱디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역시나 한복을 차려입은) 내 친구들과 함께 드럼 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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