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주제로 이야기해볼 기회가 여럿 있었다. 당신에게 의미 있는 숫자는 무엇이냐(예? 숫자요?), 당신의 글쓰기 이력에 대해 말해봐라(예?? 글쓰기 이력이요?), 매미에 대해 써봐라(매..매미요?)…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주제들이 오가는 와중에 이 질문이 있었다.
“당신의 소울 푸드는 무엇인가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도 아니고, 책에나 나올 것 같은 질문을 실제로 던지는 사람이 있다니!
그러나 곧 ‘소울 푸드’라는 뻔하고도 낯선 단어에 대해 요리조리 생각을 해보게 됐다. 소울 푸드라… 피자와 파스타를 좋아하긴 하지만, ‘소울’을 붙이기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소울 푸드는 왠지 엄마 음식이어야 할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딱히 '엄마 음식'이라고 떠올릴 만한 게 없다. 엄마의 식탁을 생각하면 음식보다는 예쁜 그릇, 예쁜 티슈, 예쁜 잔 같은 것이 먼저 떠오른다. 엄마가 음식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자주 안 해주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렇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엄마 음식' 하면 떠오르는 게 생겼다. 고구마 맛탕과 감자 고로케(정식 표기는 '크로켓'이지만 어쩐지 고로케가 잘 어울리는 기분이다)!
임신했을 때부터였던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제부턴가 엄마는 나만 보면 자꾸만 기름을 끓였다. 고구마를 네모나게 썰고 적당히 끓는 기름에 넣고 휘휘 젓다가 젓가락으로 콕 찔러 익은 게 확인되면 꺼내서 기름을 툭툭 털어 조청을 붓는다. 뜨거운 고구마 열기에 조청이 녹아 고루 달달해지면, 고구마 조각을 입에 넣은 채로 후후 숨을 불어 식히며 먹곤 했다. 식으면 더 맛있다고 조금 식혀 먹으라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열기가 채 식기 전에 한 접시를 다 비우고야 만다. 그리곤 곧바로 밀려드는 후회, '아 살찌겠다.....!'
감자 고로케도 마찬가지다. 감자를 삶고 으깨 손으로 조물조물 동그랗게 만들어 튀긴다. 말은 간단하지만 으깨고 조물 거리고 튀기는 과정이 은근 손이 많이 간다. 엄마랑 마주 앉아 고로케를 빚으며 너무 크다 너무 못생겼다 잔소리를 곁들인 수다를 떠는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무엇보다, 빗소리에 가까운 경건한 튀김 소리를 들으며 가장 먼저 채반에 올라온 고로케를 집어 먹으면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는 말이 절로 이해된다. 바삭한 튀김 속에 고소하고 부드러운 감자. 역시 한 접시를 해치우고 나면 죄책감이 밀려들지만 어쩔 수 없다. 고로케를 앞에 두고 이성을 잃지 않는 건 반칙이다.
아기를 낳으러 가기 몇 시간 전에도 그 고구마 맛탕과 감자 고로케를 먹었다. 왜 하필 튀김이냐고 묻자, "제일 맛있잖아" 하는 싱거운 답이 돌아왔다.
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그렇게 고구마와 감자가 먹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부터 나는 감자와 고구마를 유난히 좋아했다. 엄마는 임신한 내게 감자와 고구마 요리, 그중에서도 손이 많이 가는 메뉴를 해주고 싶었나 보다. 지금도 집에 가면 엄마가 묻는다. "맛탕 해줄까?" 그 말이 "사랑해"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