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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Dec 09. 2022

시간은 흐르지 않고 쌓이는 것이어서

책에 들어갈 화보 촬영 디렉팅을 다녀왔다. 사진작가를 섭외하고 스튜디오를 고르고 촬영 레퍼런스를 찾아 계획안을 만드는 과정을 오랜만에 다시 했다. 잡지사를 떠난 뒤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으니, 거의 5년 만의 촬영장이었다. 현장에 미리 도착해서 사진작가와 어디서 무엇을 찍을지 이야기하고, 소품과 현장을 체크하고, 사진 톤을 정하고, 모델에게 콘셉트와 포즈를 설명하고, 심지어 즉석에서 천을 기워 옷의 형태를 잡는 일까지 나의 몫이었다. 모두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다음엔 뭘 할까요?'


한바탕 정신없이 촬영을 진행하다가 밖을 보니 곧 비가 올 것 같다. 일몰 즈음 근처 공원으로 이동하기로 한 계획을 수정해 스튜디오 마당의 잔디밭을 활용하기로 했다. 가을에 봄 느낌을 내려고 보니 잔디밭에 낙엽이 한가득이다. 실내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 다음 촬영을 준비하기 위해 호다닥 밖으로 나와 낙엽을 줍다가 혼자 웃음이 터졌다.



스물두 살에 대학생들이 만드는 잡지의 에디터로 활동했었다. ‘패션 에디터의 여행 가방’이라는 주제로 온갖 트렌디한 물건들을 캐리어에 담아 찍는 화보였는데, 그때 처음으로 그런 촬영을 해봤다. 브랜드에 전화를 걸어 협찬을 받고, 그 물건들을 받아 분류하고, 사진작가를 섭외했다.

드디어 촬영 당일. 내 몸만 한 캐리어에 촬영에 필요한 물건을 꽉꽉 채우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근처 다이소에 들러 옷걸이와 자잘한 소품을 손에 잡히는 대로 샀다. 몸은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도, 처음 맡은 2페이지짜리 기사를 보란 듯 잘 만들어 내고 싶은 마음과 낯선 상황을 온전히 주도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가 뒤섞여 도망치고 싶었다.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끌던 나는 결국 역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그날 촬영을 잘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재촬영을 했었던가. 아무튼 잡지에 기사가 실린 걸 보니 영 망치지는 않았나 보다. 다른 건 희미한데, 역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던 모습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낙엽을 주우며 오랜만에 십여 년 전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마~~~~이 컸군.’


“셰익스피어 연구에 수년을 바친 선배가 교수 임용에 탈락한 후 귀농을 결심했고,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박사 학위를 받은 동창이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신 가업을 이어받아 음식점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던 안타까움이 장 지오노를, 간디를 읽고 나서 새로운 기대와 긍정으로 이어졌다.
김을 매고 새참을 먹고 논두렁에 앉아 셰익스피어를 읽는 농부. 지극히 한국적인 요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뤄내는 경영자. 결국 한 사람의 경험의 총체가 그 사람이 하는 일에서 우러나오게 하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김남주 <나의 프랑스식 서재> 중에서


결국 한 사람의 경험의 총체가 그 사람이 하는 일에서 우러나오게 하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자기소개서를 쓸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문장을 활용하곤 했다. 중구난방인 내 이력을 포장하기에 이보다 나은 문장은 없는 것 같았다. 국어국문을 전공하며 디자인을 공부하고, 생뚱하게 미술 잡지에 취업해 미술관을 드나들다가, 건축가와 목수들을 만나며 잡지를 만들다가, 결국은 출판사에 소속된 스스로를 납득하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한 우물을 파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솔직히는 이러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도 했지만, 시간은 흐르지 않고 쌓이는 것이어서 한 사람의 경험의 총체가 어떻게든 우러나오게 된다는 말을 믿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 믿음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서른이 된 내가 스무 살의 나보다 무엇이 나은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보다 월등히 글을 잘 쓰는지도 모르겠고, 당황스러운 상황에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무모할 정도로 끓어올랐던 열정은 턱없이 사그라들었다. 그때의 나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은 기분. 성장하지 못한 채로 그냥 나이만 먹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막막했다.


그런데 촬영장에서 여유롭게 상황을 지휘하고 낙엽을 주우며, 느낌표가 지나갔다. 그냥 흘러갔다고 생각했던 십여 년 동안 시간이 흐르지 않고 쌓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담감에 짓눌려 역 앞에서 엉엉 울던 스물두 살의 나로부터 조금씩 쌓여 웃으며 상황에 대처하는 내가 되었구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결국 한 사람의 경험의 총체가 그 사람이 하는 일에서 우러나오게 하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다시 이 문장을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거두기로 했다. 애쓰는 순간순간이 모여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으며, 내 경험의 총체가 내 일의 곳곳에 묻어나기를 바라며 킵고잉 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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