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없는 전시를 준비하며 배운 것들
전시 참여자는 나까지 넷이었다. 구성원도, 전시 공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뻔하긴 하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모두의 화두니까, 홍보만 잘하면 괜찮을 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나는 전시에 낼 작품 준비나 잘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응 아니야)
전시 일주일 전, 성수동에서 열린 브런치 팝업 전시에 다녀왔다. 즉석에서 작가 카드를 만들어주는 것도, 브런치 공모전을 통해 첫 책을 출간한 작가와 브런치를 시작으로 베스트셀러에 다다른 작가의 여정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영감이 되는 질문 스티커, 작가마다 다른 글쓰기 레시피, 30일간의 글감, 셀프 브런치 커버 만들기까지, 이렇게 촘촘하고 재미난 전시라니!
무엇보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무엇이든 쓰고 싶었다. 브런치 다시 해야겠다, 나도 꾸준히 써야지. 이런 생각이 든 걸 보니 성공한 팝업이라고, 우리 전시에서도 이런 마음을 들게 하는 요소를 많이 심어두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전시장을 나왔다.
영감을 잔뜩 채운 나는 우리 전시에 적용할 점들을 찾았다. 목표는, 전시장을 나오면서 '나도 뭐라도 일단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그러려면,
1. 작가들의 이야기가 와닿아야 하고,
2. 작가의 경험이 나의 경험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1. 전시대 제작
브런치 전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나무로 제작한 전시대였다. 내가 전시할 건 완성된 책이 아니라 '시안'이라서 종이 몇 장이 전부다. 직접 브런치북 표지를 작성해 보는 코너에서 힌트를 얻어 전시대를 제작하기로 했다.
근처 목공방에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만들 수는 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부적절하다(면적이 넓어서 얇은 합판을 사용하면 나무가 휜다, 그렇다고 두꺼운 나무를 쓰자니 작품보다 전시대가 더 눈에 띈다, 벽에 피스를 박을 수 없으니 무게도 고려해야 한다)는 피드백을 받고 대형 폼보드와 나무 느낌이 나는 필름을 주문했다. 밤새 가내 수공업으로 전시대를 만들었다.
2. 표지 시안 투표로 참여 유도
"책의 첫인상을 함께 만들어요!" 관객이 작품에 참여하는 요소를 만들고 싶었다. 표지 시안을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 고르도록 했다. 반드시 투표 결과에 따라 표지를 결정하는 건 아니지만, 표지를 고르기 위해 유심히 보게 되고 자기가 투표한 표지가 선택되는지 지켜보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표지는 날개까지 실제 책 커버처럼 만들어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했다.
3. 손글씨 설명
동네서점에서 손글씨로 적은 책 설명을 볼 때면, 왠지 더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진다. 작품만 걸어두는 것보다 관객에게 편지 쓰듯 짧게 설명을 적어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전시 결과는 어땠냐고? 두괄식으로 썼듯, 망했다. 몇 명이 왔는지 차마 적지 않겠다. 속상하니까. 실패의 원인은 내가 베스트셀러를 못 만드는 이유와 비슷했다. 만드는 데 집중하느라 홍보와 마케팅을 소홀히 한 것, 독자(관객)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것, 독자(관객)에게 줄 수 있는 게 명확하지 않은 것.
하지만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 굉장히 의미 있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그랬다. 그게 정말 놀라웠다. 전시를 하고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1. 이게 되네?
무리한 스케줄, 아무 기획도 경험도 없는 사람들과의 협업, 그 와중에 보여주기용이 아니라 진짜 책을 만들기 위한 시안 만들기(글도 쓰고 판형도 정하고 디자인도 하고 심지어 전시대까지 몽땅 혼자 만들어야 함), 현장 진행 및 개인 발표, 게다가 육아. 쓰면서도 조금 어이가 없는데 아무튼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해야 해서 이게 될까? 싶었는데 이게 된다.
2. 혼자 하는 일은 하나도 없구나.
전시는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다. 나는 디테일을 챙기는 사람이고 내 몫의 완성도를 내느라 다른 건 잘 못 보는데, 내가 놓치는 것들을 함께 챙기고 채워주는 사람들 덕분에 무사히 문을 열 수 있었다. 특히 큰 그림을 체크하고 진행하면서도 연신 '고맙다'고 하는 기획자를 보며 많이 배웠다.
3. 완성하는 경험
'이렇게 작은 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시간 낭비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고백하자면 그래서 지인들을 초대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없어서. 하지만 규모나 관객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완성하는 경험을 해봤다는 것. A부터 Z까지, 말도 안 되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챙기고 선택하고 준비해서 오픈 시간에 '자 완성! 이제 누구든 와서 보세요!'를 외쳤다는 게, 그게 엄청 큰 의미라는 걸 깨달았다. 책을 만들면서 그런 경험은 충분히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오프라인 공간을 구현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4. 다시, 시작
시안 작업이 전시용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아마 나 혼자였으면 전시가 끝남과 동시에 '아 뿌듯하다' 하고 흐지부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추진력의 기획자를 만난 탓, 아니 덕에 꼼짝없이 출간을 하게 생겼다.
당장 전시 다음 주에 여의도 위워크에서 표지 투표를 진행하기로 했고, 12월 중순에 있을 '2024 연말파티 겸 출간기념회' 장소 섭외까지 마쳤다. 다시 마감일이 잡혔다. 언제나 그렇듯, 또, 일정은 빠듯하다. 그렇게 얼떨결에 책을 만들게 되는데!
다음 편에 계-속
그렇게 마감한 책은 12월 22일까지 텀블벅에서 먼저 만나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