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윤 Jul 27. 2020

적응이 가장 큰 성과

전학 짬바를 살려 빠르게 적응했던, 2020년 7월의 회고

단위 시간의 묘함이 있다. 하루, 일주일, 한 달, 분기, 반년, 일 년처럼 한 단위의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입사하고 만 3개월, 즉 한 분기를 채우고 4개월 차에 들어서면서 많은 것이 안정되었다. 일은 아직 서툴고 내가 쓰는 카피는 여전히 구리고 매일 우당탕탕의 연속이지만, 안정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데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멘탈의 요동이 잔잔해졌고, 나만의 업무 리듬이 생겼고, 동료나 고객으로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낯가림이 끝났다. 한 마디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거다.


여러모로 사람이 편안해진 것처럼 보였는지, 아니면 단위 시간이 지나서 물어볼 때가 된 것인지 최근 들어 "요즘 회사생활 어떠냐?"는 질문을 더러 받는다. 그때마다 자신있게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이제는 적응한 것 같아"라고 답한다. 적응의 기준은 너무도 주관적이지만 동시에 극도로 정확하다. 그저 느낄 뿐이기 때문이다. 느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느끼면 그런 것,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그렇지 못한 것일 뿐.


동료 중 한 분이 내게 빠르게 적응하는 방법을 물었다. 잠깐 고민한 뒤 나온 대답은 "생각해보니 제가 적응에 대해서 짬바가 있어요"였다. 빠른 적응은 전학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의 결과물이었다. 다닌 초등학교만 5개, 중학교만 2개라, 고등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한 학교에서 2년 이상 다녀보질 못했다. 가장 짧게 다닌 학교는 포항의 한 초등학교로 반년 정도 머물렀다. (다녔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난이도를 따지자면, 새직장에 적응하는 것보다 새학교에 적응하는 것이 더 어렵다. 입사는 정해진 날이 있어서, 내가 그날 새로 처음 출근한다는 것을 동료들이 알고 있고, 나를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전학은 그렇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애가 선생님의 "어, 그래. 전학생 들어와~" 소리에 맞추어 앞문을 드르륵 열고 쭈뼛쭈뼛 등장하는 일이다. 아무도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시작부터 하드하기 때문에, 전학생은 눈치가 생명이다.


전학생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조심해야 하는 요소를 찾는 것이다. 새로 속하게 된 집단에서 금기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빠르게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누구를 조심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하면 안 되는지 같은 것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개인의 캐릭터와 그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지형지도를 파악하는 일이다. 낯선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고, 각자의 특징을 숙지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도를 파악하고, 그 관계도에 의해 일어나는 특수한 상황들을 기억한다. 조용히 지내며 하나 하나 알아가다 보면, 어느샌가 나는 좀 더 적절하고 능숙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된다. 그걸 스스로 느끼는 순간 알게 된다. 적응이 끝났다는 것을 말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도 3개월 쯤 걸렸던 것 같다.


이번 3개월도 그런 시간이었다. 회사와 동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하는 것부터 익혔다. 다행히 매뉴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조직이라, 다른 사람들을 덜 귀찮게 하는 선에서 빠르게 숙지할 수 있었다. 적어도 해를 끼치지 않는 구성원이 된 이후로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관찰했다. 그 사람의 업무 스코프와 루틴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은 어떤지, 커뮤니케이션할 때는 어떤지, 협업을 하는 상황에서는 어떤지,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하나하나 익혔다. 이렇게 익히는 일은, 이미 형성된 집단 안으로 내가 들어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내 안에 그 사람들을 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서로가 더이상 낯설지 않은 존재가 되는 순간 적응이 끝난다. 나는 좀 더 적절하고 능숙하게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된다.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평가는 아무도 내려줄 수 없다. 그걸 느끼는 사람, 내가 가장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중간 평가 차원에서 대표님과 1대1 면담을 하는 날, 지난 3개월 동안의 가장 큰 성과를 물으시기에 "적응한 것이요"라고 대답했다. 회사의 성공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일을 아닐지라도, 새로운 환경이 요하는 조건에 맞추어 알맞은 사람이 된 것은 분명히 나의 성과였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번 분기, 그리고 7월의 성과일 뿐이고 다음 분기에는 같은 질문에 다른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적응이 끝나고 새로운 차원의 고민이 찾아 왔지만, 7월이 끝날 때까지는 애써 외면해볼 생각이다. 당당히 얻어낸 성취를 어느 정도는 즐기는 시간도 필요하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