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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은 아이의 불행인가?

우리가 가진 고정된 관념들

by 책한엄마

나는 결혼과 함께 청량리 미주아파트에서 시할머니와 살았다.
이 아파트는 한때 ‘타워팰리스’라 불릴 만큼 최고급 아파트였지만,
내가 살던 시기에는 70년대식 낡은 건물이 되어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그곳엔 오랜 세월을 버티며 살아온 노인들이 많았다.
앞집 할머니 역시 그런 분 중 한 분이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인사를 드리자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새댁, 들었어? 10층 할머니 돌아가셨어.”

놀라며 가족 걱정을 하자, 할머니는 태연히 웃으며 덧붙였다.

“에이, 100살 넘었어. 누워 있는 사람 수발 들던 70대 아들도 더 먼저 죽는 줄 알았다니까.
잠들다 가셨다니 얼마나 부러워.”

20대 새댁이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죽음조차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느꼈다.


이혼도 마찬가지다.

아이에게 이혼이 불행일까?

내 상황을 가까운 이들에게 알렸을 때,
한 분이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언니, 정말 잘하셨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 사이가 찢어져 있다는 걸 알았어요.
엄마는 저 때문에 이혼을 못 한다고 하고,
아빠는 엄마 때문에 인생이 안 풀린다며 화내고…
저는 그 중간에서 평생 눈치만 봤어요.”

그분은 최근에서야 엄마가 별거를 시작했다며
“정말 이제야 살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알았다.
이혼이 아이를 불행하게 하는 게 아니라,
부모의 불행이 아이를 삼키는 것이라는 걸.


나의 셋째, ‘독립’이라는 기적

나는 셋째 아이가 가장 걱정이었다.
지적장애 3급. 초등학교 2학년.
아직도 잠자리 독립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집을 나오자
아이도 함께 ‘강제 독립’이 되었다.

첫 이틀은 격렬하게 울었다.
그래도 “베이비 위스퍼” 방식처럼 단호하게 말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삼일째 되는 날, 아이가 말했다.

“엄마 잘 다녀와! 내일 만나!”

아이가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강했다.
사랑이 있으면 적응한다.

나의 둘째, 마음속 성인

둘째에게 가장 먼저 이혼을 알렸다.

“엄마… 우리가 따로 살아?”

울먹이면서도 내 표정을 살피던 아이.
나는 말했다.

“응. 차차 그렇게 될 거야. 그래도 보고 싶으면 볼 수 있어.”

아이에게는 공포 대신, 오히려 안도감이 흘렀다.
그 아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관계의 균열을 알고 있었다.


충격적인 반전: 첫째의 반응

나는 첫째가 가장 걱정이었다.
정서 불안으로 위클래스 상담을 받고
병원에서 약까지 처방받았던 아이.

내가 이혼을 말했을 때,
거짓말처럼 아이 얼굴이 밝아졌다.

“엄마, 이혼하려고?”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엄마, 내가 좆이 없지만
이제부터 좆대로 살 거야! 만세!!”

중학생 특유의 거친 말이지만
그 안에 담긴 해방감은 너무나 선명했다.

불행한 건 아이가 아니라 나의 억눌림이었다.
아이는 그걸 그대로 비춰온 거였다.
나처럼, 감정의 거울처럼.

잘 살고 싶은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걸…
이때 알았다.


아이에게 이혼은 불행이 아니라 '기회'였다

✔ 셋째에게는 독립의 기회
✔ 둘째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모델링
✔ 첫째에게는 엄마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며 진짜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

이혼은 아이들의 불행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삶의 방향을 배우는 시작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애들 불쌍해서 어쩌니…”

나는 이제 이렇게 답하고 싶다.

“불쌍한 건 아이가 아니라, 이미 끝난 결혼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어른의 마음입니다.”

이혼은 실패가 아니다.
불행도 아니다.

이혼은 잘 끝내는 용기이고,
우리는 지금 ‘잘 끝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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