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정신적인 문제라고 부를만한 상태였다. 질병의 수준까지는 아닌 것 같았지만, 적어도 어떤 ‘문제’는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걱정했고, 때때로 괜찮냐고 물어왔다.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내 마음 하나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도서관에 갔다. 최근 이사 온 집 근처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중앙도서관의 장서도 미리 신청해 두면 이쪽으로 보내주고, 대출과 반납도 다 여기서 할 수 있으니 편리하다. 대형마트의 길게 늘어선 매대 사이에서도 종종 눈앞이 멍해지는 나에게는 이 정도가 좋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을 빌렸다. 누가 읽어보라고 했었는데, 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때마다 앓았다. 힘겨웠고 그 무엇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했다. 오래전 그랬던 그때에도 나는 그녀의 소설을 읽고 어떻게든 살아 나왔었다. 집에 와서 책상을 겸해 사용하고 있는 식탁에 앉아 책을 읽어내린다. 책장 사이에서 주인공이 죽음과 화해하기 직전에 나는 생각한다. 조금, 배가 고프다고.
밥은 먹어야 한다. 잠도 자야 한다. 숨은 쉬어진다. 모든 것은 떠나보내야만 하고, 언젠가는 떠나야만 한다. 니체는 우리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세계에 대해 말했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 또 반복되는 일.
그런 세계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서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고.
삶이 영원히 반복된대도 그 안에서 우리는 또 떠나보내고 떠날 것이다. 그런데 그 세계에서 두 번째 나는 첫 번째를 기억할까? 백 스물일곱 번째 나는 이것이 백 스물여섯 번 이미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나는, 백 스물일곱 번째 이별은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백 스물일곱 번째 만남은 또 어땠을까.
혹여 삶의 끝이 다시 반복되는 삶의 시작이 되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처음인 채의 삶을 살아낼 것이다.
또 다시 떠나보내고, 떠날 날을 향해 가리라.
기나긴 여행처럼 살아가는 편이 좋다. 낯선 길거리에서 개똥을 밟는대도, 돌아오는 길에 발을 헛디뎌 넘어진대도. 그냥 웃고 털어 넘길 수 있을 만큼 길고 즐거운 여행으로. 그곳으로 다시 떠날 수만 있다면 그날을 고대하며 고단한 출근도 때때로 닥치는 힘든 일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행복한 여정으로 살아내야지.
일단 밥을 먹자. 몸속으로 생명을 밀어 넣고, 나는 또 어디로 가려나. 이 삶을 생각한다. 고통만큼 자라 이렇게 된 삶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