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37.0 by Nonc
'달빛과 칼제비' 오디오북 링크
아침에 보낸 문자의 답으로 ‘칼제비'란 말이 왔다.
칼제비, 칼국수와 수제비의 합성어. 식사 무렵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 바로 ‘육칼'이 떠올랐다. 칼제비란 단어를 최근에서야 처음 알았다는 해다에게 “마치 육칼같은 거야, 한국식 짬뽕이지.”라는 가벼운 답변을 했다. 그리고 이게 왜 가벼운 답변인지를 깨닫는 데에는 불과 하루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칼국수는 원래 태생이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시대의 한글 조리서 <규곤시의방>에는 절면(切麵)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칼국수의 증조할아버지 쯤 되겠다. 절면의 재료는 지금의 칼국수처럼 밀이 아니라, 메밀이었다. 당시에는 밀이 귀했기 때문이라 한다. 칼국수가 뜨끈뜨끈한 온면임에도 불구하고 여름 음식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음력 6월 15일 전후로 귀하디 귀한 밀을 수확하여, 그 무렵 가장 맛이 올라있는 감자와 애호박을 썰어 넣어 맑은 장국에 낸다. 설명에 따르면 주 재료가 메밀이고 연결재로 밀가루를 섞어 쓴다고 나와있다. 요리 학도가 아니라 연결재로 쓴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것은 아마 메밀 만으로는 면에 탄력이 부족하여 쫀득쫀득한 식감을 위해 밀을 배합했다는 말인 것 같다. 예전에 일본의 사국지방을 여행했을 때에 우연히 백 프로 메밀로 만든 소바를 (일본 말로 메밀이 곧 소바다.) 먹을 일이 있었는데, 메밀의 향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식감에 매료된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더더욱 그럴 것이라고 추측한다.
메밀과 밀의 신분이 뒤바뀐 것은 6.25 전쟁 이후다. 태평양 너머 미국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 한반도에 상륙한 것이 비단 맥아더 장군의 함선뿐만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미군의 구호품으로서 밀이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한국 사람 입맛의 중심축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이 이후로 드넓은 토지에서 대량으로 수확한 밀이 한반도에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밀로 만든 음식이나 과자가 지천에 널려있고, 오히려 한반도를 대표하던 식재료인 메밀은 건강식이라는 프리미엄을 누리며 귀한 대접 받고 있다. 칼국수 또한 마찬가지다. 한자적이고 양반적인 명칭인 절면. 자르다는 의미의 절이 그것을 실행하는 도구 ‘칼'로 바뀌었고, 면 또한 좀 더 친숙한 표현인 ‘국수'로 바뀌었다. 절면의 절은 아주 귀한 재료를 주물러 만든 반죽을 절절매며 신중하게 자르는 인상을 준다. 반면에 ‘칼'은 그 강력한 발음 때문인지 이미 능숙한 솜씨로 탕탕 탕탕 도마를 울리며 신속하게 잘라내어 그 면발에 칼의 날 선 인상까지 남아있게 만드는 시장 아줌마의 정겨운 완력을 떠올리게 한다. 요새는 손맛마저 귀한 탓인지, 역이나 시장 근처에서 기계로 뽑아내는 칼국수를 먹는 데에 드는 돈은 불과 3~4천 원 밖에 안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게 칼국수는 양반집 높은 담자락 너머에서 한철에만 게 눈 감추듯 먹을 수 있는 것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서민 음식으로 변천하게 되었다.
무당 마을과 떡볶이 골목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나는 그것이 신당동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 또 하나는 ‘달빛’이다. 떡볶이로 유명한 신당동의 신이 새롭게 된 것은 갑오개혁 때의 일이라고 한다. 그전까지는 오랜 기간 새로울 신(新) 말고 귀신 신(神)을 썼었고, 말 그대로 신당(神堂)이 모여있던 곳이다. 지금의 청구역 근처에 위치한 광희문은 한양의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로, 수구문 또는 시구문(屍軀門)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밖으로 시신을 내보내던 곳으로, 상여가 들락날락하는 광희문 밖 신당동에 자연스레 공동묘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 신을 모시는 무당들이 모여드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겠다.
무당과 시신의 마을, 신당동이 떡볶이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953년의 일이다. 지금은 한국인의 소울 푸드가 되어버린 고추장 떡볶이가 바로 그 해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 후에 이 일대로 떡볶이집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여 떡볶이 골목이 형성되었고, 80년대에는 떡볶이집마다 DJ 박스가 있었다고 하니, 멋쟁이 DJ 오빠를 보러 떡볶이 골목에 삼삼오오 찾아가는 당시 여학생들의 수줍은 모습이 상상된다. 정작 나에게 신당동 떡볶이란 그 시절의 인기가 크게 쇠락한 2천 년대가 돼서야 처음 가본 곳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때까지 DJ부스에서 노래를 트는 사람이 있었다. 불독맨션의 노래를 신청했는데, DJ가 잘못 보고 “물똥맨션"이라고 하는 바람에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 실소를 자아낼 꽁트와 같은 나의 20대의 기억과 잘나가던 시절 신당동이 품었던 낭만 사이에도, 무당 마을과 떡볶이 골목 사이만큼의 긴긴 시간은 아니지만 분명한 간극이 있다. 전시장이 있는 로얄빌딩이 서있는 황학동(黃鶴洞) 또한 오랜 기간 신당동에 속해있다가 분리해 나왔다. 예전에 논밭이었던 이곳에 ‘노르스름한 깃털의 두루미가 날아들었다’는 신비로운 전설에서 유래한 지명이지만, 지금은 온갖 골동품이 모여있는 도깨비시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살펴본 신당동과 황학동의 역사 그 어디에도 미술작품이 머물러야 할 필연적 근거는 없어 보인다.
로얄빌딩을 찾아서
강북에만 아홉 개의 ‘로얄빌딩'이 있다. 해다가 전시 정보를 게시하기 전에 전시의 준비과정을 SNS에 띄웠는데, 마치 2016년 광주 비엔날레의 제2관에 마련된 세련된 검은 공간을 연상시키는 매우 훌륭한 전시장 풍경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다음 장에 게시한 그것을 전시한다는 곳의 외관과 도저히 매칭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든 생각은 간단하다. ‘여긴 꼭 가봐야 해!’. 사진에 있는 건물 간판에 ‘로얄빌딩'이라고 쓰여있길래 검색을 해보니 서울에만 스무 곳 가까이 뜨더라. 요새는 GPS 기반의 위성사진 식별 기능이 너무나 잘 되어있어, 검색한 위치의 대략적 풍경을 손가락 몇 번만 튕기면 금세 알 수 있다. 그리고 저 정도의 정취를 ‘뿜뿜'할 수 있는 지역은 서울의 완전 중심지인 중구, 종로구, 동대문구 일대라는 추측을 시작으로 하나하나 확인해 나갔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바로 신당역 부근. 이런 과정 때문에 실물 간판을 직접 영접했을 때에 어떤 희열마저 느낄 수 있었다. 로얄 빌딩의 간판은 지금 시대에 보면 다소 촌스러워 보일 수는 있지만, 나에겐 아득히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텔레비전에 박혀있던 골드스타 로고를 보는 것만큼의 향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위풍당당함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더욱 흥미로웠던 건, 하얀 마녀로서 찾아간 이 기묘한 전시에 나를 반긴 것은 ‘로얄빌딩' 간판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그릇 가게의 이름이 바로 ‘마녀키친'이었던 것이다. 해다는 마녀랍시고 치마를 입은 나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반기며, 전시 준비 과정의 우여곡절을 들려주었다. 어떻게 이곳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예술감독의 생각이었다고 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예술의 불모지와 같은 황당한 곳에서 이 압도적인 퀄리티로 전시할 생각을 했을까 하며 찾아봤더니 그 이름의 주인공은 곧바로 나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다. 김신일이라는 이름은 오래전에 한번 머리에 각인되었는데,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두 해쯤 지났을까? 한국 미술계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하여, 몇 해간의 올해의 작가상에 오른 미술작가들부터 훑어보며 공부하다가 알게 된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글자와 커뮤니케이션으로 작업을 해왔던 나에게 김신일 작가의 작품 세계는 그냥 지나쳐질 리가 없었다.
2014년도 ‘올해의 작가상’ 네 명의 작가 중 한 명인 김신일 작가는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해왔으며, 하얀 평면에 압력을 가하여 글자의 형상을 올록볼록하게 새기는 ‘압인 드로잉’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리고 그것에 담긴 작가의 생각은 개념미술로서 나의 출발점이었던 작품들과도 놀라우리 만치 비슷했다. 아마 그랬기 때문에 6년 전에는 ‘에잇'하고 덮어버렸을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오랜만에 마주한 이름이 걸어온 족적을 검색하면서 찾은 것들 - 그의 매체가 하얀색인 이유 또는 ‘범주화를 깨고 싶은 작가', ‘간극'과 같은 수식어에 마구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위화감을 느끼며 밀어냈지만, 지금의 나에겐 비슷한 성향의 앞선 세대의 작가가 미술계에서 이미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감을 얻고 반길 일이었다. 김신일 작가의 작품은 그의 생각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다. 문자라는 이미 말해지는 것들을 가지고, 나의 교토 센세이 중 한 명인 코헤이 나와의 뺨을 대차게 후려칠 정도로 정제된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에서부터 경의를 표한다. 어쩌면 내가 같은 출발점에서 코헤이 나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바꿔 얘기하면 내가 코헤이 나와를 만나지 않았다면, 머지않아 김신일이란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을 것이란 말도 성립한다. 그리고 그였기에 이미 미술이 놓여있는 범주화된 친숙한 테이블들을 뒤로한 채, 신당역 인근 로얄빌딩 지하에 예술감독으로서 이 전시를 마련한 것 또한 깊이 수긍할 수 있다.
금강경 야부송의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다.”는 경구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된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전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계에서 인식의 경계란 감각할 수 있되 그 흔적은 찾을 수 없는 달빛과 같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전시장 한편에 놓여있는 텍스트는 이런 내용으로 전시의 포문을 연다. “색이 지닌 선입견 비워내려 색을 쓰지 않는다”라는 김신일 작가의 인터뷰는 그가 만들어 낸 ‘명명(命名)을 탈피하는 하얀 오브제 혹은 하얀 세계’를 가장 잘 담아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또한 반야심경의 요체와 같은 구결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에 맞닿아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미술작가에서 예술감독으로 - 반야에서 금강으로 한 번 더 건너가 ‘달빛'을 구해왔다.
달빛은 미술작가이면서 동시에 예술감독을 수행해야 하는 그에게 걸맞은 최적의 표현이다.
먼저 이 말에는 겸손(謙遜)이 담겨있다. 생소한 장소에서 색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인식’을 소개할 뿐, ‘섬돌에 티끌 하나 일지 않고, 연못에 흔적이 없다’는 것처럼 원본에는 기획자로서 아무런 가미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뒤에 “불분명한 곳에 머무르며 끊임없이 세계를 다시 보려는 예술가들의 은유와 추상이야말로 예술 행위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임을 발견하고, 머물러 있지 않는 인식 그 자체를 향한 노력” 이란 문장으로서, 그가 달빛으로 물러서면서까지 조명하고 싶은 것을 서술해 놓았다. 두 번째로 달빛은 그가 고안한 공(空)으로 가는 심연의 하얀 문이다. 관객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약간의 번거로움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달빛을 형상화한 핀 조명 아래에서 전시장의 정결을 위하여 덧신을 신어야 하는 것. 그렇게 노동으로 인식한 달빛의 순간이 바로 ‘레드 썬', 아니 ‘화이트 문!!!’ 감독이 거는 신박한 최면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전시장에 마련한 작가들의 작품을 진실로 마주할 수 있다. 감독은 저 개구쟁이 나타의 혼천릉처럼 색의 경계를 휘휘 저어서 공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 역설적으로 가장 뚜렷한 다섯 가지 색을 모셔왔다. 그것이 바로 문서진, 박관택, 서용선, 유승호, 조현선의 마스터피스 들이다. 예술감독으로서 그는 그의 전매특허인 하얀색도 아니고 하얀색과 궤를 같이하는 총천연색도 아닌 달빛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완벽한 달빛이 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것을 발길이 뜸할 무렵 전시장을 찾아온 어느 손님이 알게 해 주었다.
해다와 잠시 숨돌리러 지상으로 빠져나갈 때에, 어느 백발의 여성이 다른 젊은 여자 손님과 함께 전시장을 찾았다. 해다랑 동시에 “저 사람은 누굴까?” 하고 했을 만큼, 찾아온 손님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색으로만 따지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마녀를 자칭하는 나의 요상한 복식보다 만 배는 더 그것에 가까운 하양 일색이었는데, 하얀색 소재의 옷을 저렇게 느낌 있게 소화하는 사람을 좀처럼 볼 일이 드물어서 더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 그녀가 전시장을 감상 후에 김신일 예술 감독의 안부를 물으며, “이 전시는 그의 제자들의 전시인가요?”라는 말을 건넸을 때, 처음에는 ‘아, 미알못(미술을 잘 알지 못함)이시구나~’ 하고 말았다. 해다는 그런 그녀에게 이곳에 모신 작가 한 명 한 명의 면면을 바지런히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뜻밖의 단어가 그 하얀 손님의 입에서 튀어나왔는데, 나중에 전시장을 벗어난 한참 뒤에서야 그 말을 곱씹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아~ 작품들이 다 젊어 보여서요.” 적어도 80년대 초중반 내지는 70년대 생일 다른 작가들은 차치하고, 이미 칠십대에 접어든 서용선 작가의 그림을 보고 나서 관록이 아닌 젊음을 말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단순히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신일 같은 미술작가와 친분이 있고, 아트페어나 현대미술관의 굵직한 미술 전시는 챙겨봤을 것 같은 사람이 한국 화단의 강렬한 시그니처 중 하나인 서용선의 그림을 한 번도 못 지나쳤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반추의 과정은 나의 시선을 다시 ‘달빛'으로 돌아가게 했다.
특유의 묵직한 필선과 강렬한 색감. 낮의 화이트큐브에서 서용선의 그림을 보노라면, 그 압도적임을 고스란히 증명하는 화가의 붓 터치가 햇살 혹은 밝은 조명 아래 두드러져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주로 쓰는 ‘붉은 갈색' ‘퍼런색’ ‘녹색'의 대비를 더욱 강렬히 휘몰아치게 만든다. 그렇게 맞닥뜨린 서용선 화폭의 위용은 아오이(일본어로 파란색을 의미, 동시에 젊음, 앳됨을 뜻함)를 느낄 새도 없이 한방에 다가와 마음을 뒤흔들어 웅켜 쥐는 호랑이의 발톱과 같다. 그래서 낮의 조명은 ‘마띠에르적’이다. 그런데 김신일 예술감독이 구사한 밤의 달빛은 조금 다르다. 그것은 어둡고 차분한 명상적 공간에서 고요히 화폭을 조망한다. 이로 인해 관객은 낮에 훤히 드러난 화폭의 울퉁불퉁한 심상이 아닌, 살며시 톤 다운된 색채의 조화를 먼저 마주한다. 따라서 밤의 달빛은 ‘이미지적'이다. 이렇게 김신일 작가의 ‘달빛 기법'은 그보다 한참 선배인 서용선 화백의 육중한 화폭마저 그의 젊은 제자로 둔갑시켰다. 그 순간 그의 달빛은 실존했다.
전시장을 오르내리는 계단 한 쪽에 해다의 부츠가 놓여있었는데, 어두운 장내 환경 때문에 그것이 흰색인지 베이지색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새것이라기 보다는 오래 사용한 흔적을 머금고 있었는데, 그 흔적은 이 곳을 오랫동안 지켜왔을 로얄빌딩을 닮았고, 빛바랜듯한 베이지는 오래전에 이 동네를 다녀갔다는 누런 학과 닮아있었다. 하얀마녀는 그것에서 매력을 느꼈는지, 그것을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며 달빛에도 비춰보며 놀다가 갔다. 그리고 따로 그것의 이름을 물어봤다. 칼제비는 그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칼제비가 칼국수와 수제비의 합성어인 줄 알았다. 칼국수의 앞 글자와 수제비의 ‘제비'를 따와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곳에선 칼국수가 원래 칼제비였고,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떼면 손 수(手)를 써서 수제비 칼로 자르면 칼제비라고 불렀다고 설명한다. 또한 칼로 국수처럼 길게 썬 것이 칼국수, 깍두기처럼 썰어 넣은 것이 칼싹두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칼제비는 원래 칼제비였을 칼국수가 수제비와 만나 다시 칼제비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칼국수와 수제비가 합쳐진 이것을 ‘수칼제비’라고 불러야 할 일일까. 이 또한 황학을 닮아 누리끼리한 밀반죽처럼 신비한 일이다.
칼국수가 칼제비의 한 범주에 속해있던 것이든 간에, 지금은 식당에서 칼제비를 시키면 모두가 다 아는 대로 칼국수와 수제비를 합친 모습의 뜨끈한 한 그릇이 나온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비교적 최근에 여기저기서 눈에 띄기 시작한 ‘육칼’처럼 무엇이든 섞어보자는 한국식 짬뽕 정신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육개장에 칼국수를 짬뽕시킨 육칼은 칼국수라고 덧붙이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육개장의 아이덴티티가 너무 세다. 그것에는 육개장에 칼국수 베이스의 면만 담가놓았을 뿐, 제철 애호박과 감자로 정성껏 끓인 국물의 풍미란 온데간데없다. 만약 칼국수 면에 인격이 있다면 육개장에 풍덩 빠지는 순간,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할 일이다. 그런데 지금의 미술계에선 칼국수 면이 차원을 건너가 육개장에 담긴 것과 같은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미 현대 미술에서 인정하는 미술의 형태에 그 제한이 사라졌는데, 그것을 넘어 최근에는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미디어 아트나, 가상현실을 접목시킨 새로운 전시 감상 방법들이 여기저기에서 소개되고 있다. 또 한편에선 대체 불가능 토큰이라 불리는 NFT 기술력의 등장으로 인해, 새로운 미술 대륙이 인터넷 세상 안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렇다면 칼제비는 무엇이란 말인가. 밀이 귀하던 시절에 메밀과 섞어서 만들어 먹던 절면에서부터 3~4천 원짜리 시장 칼국수를 넘어, 요새는 기계화된 공정을 거쳐 나온 칼국수 면을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 칼국수 면발처럼 굴곡진 역사 속에 다시 수제비를 접목시키는 것은 같은 뿌리에서 최대한 다른 식감을 맛보게 하는 것. 섣불리 기존의 것을 버리지 않고,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다양하고 풍성한 맛을 새롭게 살리는 것. 이른바 ‘정성의 회복'이다. 그리고 이렇게 회복된 정성엔 이런 것들이 있다. 매일 열여섯 시간 동안 전시를 꾸리기 위해 흘린 땀, 달빛을 구사하기 위해 지하 공간을 공들여 카펫 깔고 검정으로 뒤덮은 노고, 네모난 작품들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고 조명의 프레임을 맞추기 위해 하루 종일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 했을 사다리길. 그리고 이것들이 최근 미술계 버블의 풍파가 휩쓸고 간 강남 한복판이 아니라, 신당역 주변 일하는 자들의 고됨과 열정 곁에 놓여있다는 것에서 감동은 배가 된다. 이 공간을 흔쾌히 허락한 주인의 마음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것들이 모여 로얄빌딩을 진짜 ‘로얄'로, 달빛을 다이아몬드보다 값진 보석으로 만들었다.
그 옛날 무당 마을이었던 황학동의 한 건물에서 달빛과 놀던 스무 번째 하얀 마녀의 이름은, 해다의 부츠 이름에 달빛의 루나에서 따온 ‘루'를 교묘하게 섞어서 ‘카루제비'라고 부르기로 했다. 가장 예술적인 순간을 직면하는 것은 예로부터 소수의 예민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하늘 아래 낮과 밤으로 나누어 있어, 전 세계 모두가 하루에도 한 번씩은 태양을 보게 되는데, 그에 비하면 절정의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같이 움직여 부지런히 명소를 찾는 이들의 수는 티끌만큼 작은 크기에 불과하다. 진또배기 예술이 태동을 할 때에는 그것이 영향을 끼친 숫자나 규모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아내고 가꾸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오늘 하얀 마녀로서 신중하게 소개할 첫번째 ‘하얀 마녀의 조각 - 하얀 마녀스러운 것’은 바로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이다. 부디 이곳에 오는 이들에 당신의 날선 예민함을 만끽하고, 또 마음 한 켠 나누고 오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전시 관람 링크
“색이 지닌 선입견 비워내려 색을 쓰지 않는다” 는 김신일 작가의 인터뷰는 그가 만들어 낸 ‘명명 않는 하얀 오브제 혹은 하얀 세계’를 가장 잘 담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누군가는 필연의 과대평가라고 말하겠지만, 바로 얼마전까지 나의 색, 나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해왔던 나에게, 하얀 마ㅓㅏ녀로서 다녀간 이 전시와의 조우가 절대 우연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 절면과 칼국수
* 신당동 떡볶이 - "연탄불에 보글보글 끓던 빨간 국물" (이미지 출처)
* “색이 지닌 선입견 비워내려 색을 쓰지 않는다”, 미술작가 김신일
* 이미지 출처 : 뮤움 - 김신일 , japantimes - kohei nawa
* $Whale NFT VR Gallery 유튜브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