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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로리 May 08. 2020

산토리니행 야간 페리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은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에서 산토리니행 야간 페리를 타면서부터였다.


가장 싼 객실엔 창문이 없어 예정보다 일찍 항구를 연 바다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산토리니에 내릴 승객은 하선하라는 오디오가 계속 흘러나왔지만 갑판을 그렇게 빨리 닫을 줄 몰랐다. 슬렁슬렁 짐을 챙겨 뱃머리로 올라왔을 때, 나의 배는 이미 산토리니에서 한 시간 반이 걸린다는 또 다른 섬을 향해 새벽의 물살을 가르던 중이었다.


멀어져 가는 산토리니를 향해 헤엄이라도 칠 기세인 나를 발견한 선원들은 미처 떨구지 못한 승객이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하다가, 다가와 살펴보니 그리스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다가, 방송을 그리 많이 해댔는데 왜 듣지 못했냐면서 한 명씩 돌아가며 나를 책망했다. 다음 정착지는 아나피라고 했다. 그때 알았다. 아나고도 아니고 오가피도 아닌 아나피라는 이름의 섬이 지구에 존재하고 있구나.


그들은 아나피에서 산토리니로 돌아오는 배가 있을 테니 상심하지 말라며 위로했으나, 수소문 결과 아나피는 다음 날까지 나고 드는 교통수단이 없을 정도로 작은 섬이었다. 본래 목적지였던 산토리니는 저 멀리 점이 되어가고, 나는 그리스어를 모르는 것만큼이나 아나피라는 섬에 무지했다.


길 잃은 에게해 어린양의 소식을 들은 선장님이 뱃머리로 올라왔다. 그는 리셉션에 주저앉은 내려다 보았다. 대체 어떤 외국인이 이런 배에서 길을 잃었단 말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나의 절망을 살피고는 서툰 영어로 물었다.


- 이 배는 항로가 왕복이야. 오늘 몇 개의 섬엘 더 갔다가 내일 아침 열 시에 아나피, 열한 시 반에 산토리니로 돌아올 거야. 아나피에서 내려 하룻밤을 머물고 돌아오는 이 배를 다시 탈래, 아니면 내일 산토리니로 내려올 때까지 계속 배에서 지낼래. 네가 선택하렴.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했던 순간이 그 해에 또 있었던가. 어차피 둘 다 전혀 반가운 결과는 아니었다. 아테네에서 출발해 산토리니를 들른 후 아나피, 카소스, 칼파도스, 디아파니, 차키를 거쳐 터키 근처의 로도스까지, 이틀간 그리스의 일곱 개 주요 섬들을 꼼꼼하게 거치며 갈 길이 먼 배였다. 그러나 아나고 혹은 오가피 섬에서의 하룻밤을 선택하기엔 나의 배짱이 불안을 이기지 못했다.


- 저 그냥, 배에서 있을게요.


그리하여 팔백오십 명을 수용하는 초대형 페리에서의 불편한 서른여덟 시간이 시작됐다. 흡사 소매물도와 욕지도, 연화도를 돌며 주민들을 실어 나르는 남도 순환 페리에 그리스인이 타게 된 상황과 마찬가지였으니 눈이 검은 승객은 나밖에 없었던 것이 당연했다. 모든 승객들이 나를 주시하는 상황이 겸연쩍어 나도 아니고 산토리니도 아니고 아나피도 아닌 어딘가에 원망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동화 같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선장님은 클라크 케이블처럼 멋진 콧수염을 기르고 고지식한 파이프 담배를 물었다. 그의 곁에는 당신만큼 늙고 꼿꼿한 레브라도 리트리버가 늘 함께했다. 나의 잔류 결정을 재차 확인한 후, 그는 배의 선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내 얼굴을 기억시키고는 일렀다.


- 이 아이에게 바다가 보이는 새 객실을 내어주라. 내일까지 배 안에서 먹게 될 모든 음식에 돈을 받지 말라. 이국에 혼자 남겨져 많은 것이 서툴 테니 모두 각별히 챙기라.


그는 내게 외부인 출입금지 구역까지 포함하여 배의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고, 중간 기착지에 머물 때마다 조종실로 불러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그리스 섬들의 뱃머리 풍경을 보여 주었다. 바다 한가운데의 갑판에 누워 오후 내 책을 읽었고, 밤이 되자 홑이불과 타월은 소리 없이 새 것으로 바뀌었다. 저녁에는 파스티시오와 올리브 문어, 무사카를 포함한 그리스 음식을 후하게 대접받았다. 미안한 마음에 지갑을 꺼내는 시늉을 하자, 웨이터는 손사레를 치면서 나의 보스가 너의 돈은 받지 말라 했다고 강조했다.


다음 날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시간에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굿모닝, 선장님이 너 오래. 나는 그의 집무실에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어디에서 왔느냐, 그리스에 며칠간 머물 예정이냐, 아테네에선 무얼 보았느냐 등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신기하게도 엉망이 된 여정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조금 가셨다.


드디어 산토리니로 되돌아왔다. 감사의 인사로 연락처를 묻자 선장님은 문물에 익숙지 않은 뱃사람이라 이메일 주소 같은 건 없다며 멋쩍어했다. 자신의 그리스식 이름과 전화번호를 쪽지에 적어주며 내년에는 자신의 고향이자 가족이 사는 낙소스 섬으로 꼭 놀러 오라 일렀다. 아테네까지만 도착해서 연락하면 당신이 직접 배를 몰고 마중 와서 낙소스까지 데려가겠노라고.


그리스에서 좋은 추억을 쌓고 돌아가길 바란다며 굳이 뱃머리까지 나와 나를 마중하던 그가 나지막이 손을 들었다.


그의 개가 눈을 들어 인사했다.


계산적인 나로서는 가까운 그 누구에게도 쉽게 베풀지 못할 거대한 인정이었다. 그리스어를 모르는 스스로가 야속할 만큼 그의 언어로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당신 덕분에 놓쳐버린 산토리니에서의 하루가 아쉽지 않았다고, 그리스에서의 남은 나날에 무탈히 행복할 수 있었다고, 따스하고 무조건적이었던 마음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라 송구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일면식도 없는 내게 건포도를 수북이 얹어주는 이들을 길 위에서 자주 만났다. 외로운 여행자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받은 약소한 친절을 평생 잊지 못한다지만, 나는 그들에게 감사한 찰나를 충분히 마음에 새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시간을 흘려보낸 것이 아직도 사무친다. 그래서 여행을 앞두고 낯선 이의 선물을 곧이 믿지 않으려 할 경계심 많은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당신이 받게 될 마음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그 진심을 시간에 묻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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