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삶은 고향을 만나는 과정이다.
일 년여 만에 마주한 그는 지난 여름 다녀온 전라도 작은 마을 이야기를 했다.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는 그곳이 고향 같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고향이 어딜까 생각하다가 내게 고향은 ‘당신’이라 말하고 싶었다. 십 년 전 한국에 돌아가 다시 겪는 ‘이방인성’에 혼란스럽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는 내게 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심어준 사람이다.
내게 삶은 고향을 만나는 여정이다. 어디에 있어도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운명 때문인지 고향은 지도 속에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에 닿았다. 고향이란 내 모습을 그대로 내 보여도 용납되는 곳, 서로의 존재 이상 바랄게 없어 실패해 돌아가도 괜찮은 곳, 하지만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이다. 내가 버릴 수도 버림받지도 않을 안전한 사람들을 나는 ‘고향’이라 부른다. 또한 그들이 가져오는 세계와 조우할 때면 내 고립된 세계가 깨지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들과 대화하면 내 세계는 넓어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부모님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나들며 스무해 넘도록 우정을 나눈 벗, 십 년째 글로 문정(文情)을 나누는 지음(知音),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반기는 도성 언니들, 삶의 소소한 부분도 깊이 나누는 사촌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내게 응원과 화살기도를 보내는 다정한 사람들이 나의 고향이다. 그리고 지금 가까이에서 고향이 되어주는 사람들까지. 내 삶은 그들로 인해 풍성하고 살아갈 의미가 더해진다.
이제 토론토에도 고향인 사람들이 생겼다. 지난 일 년 반을 온라인 북클럽으로 만나 책을 읽고 삶을 나누었다. 열 권 책을 함께 읽었고 글을 통해 생각을 나누고 벗이 되었다. 더 특별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은 캐나다의 첫 독자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검증되지 않은 책을 기꺼이 읽어주었던 사실로도 뭉클했다. 밑줄 그어준 문장마다, 공감해 준 페이지마다 나를 향한 응원과 격려로 알고, 뜨겁게 고마웠다. 밴쿠버와 거리 1356km, 5시간 비행과 3시간 시차, 한 나라에서도 이렇게나 먼 곳에 40시간의 일정으로 다녀왔다. 나를 환영하기 위해 여러 마음들이 모였다. 방을 내어주고, 시간을 나누고, 먹을 것을 만든 다정한 환대와 따뜻한 마음에 매 찰나가 특별했다.
내 서툰 문장에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고, 모니터 안에서 내보이지 않았던 나의 깊은 모습까지 보았다.
'한나를 신뢰해요.’
대화 중 몇번이나 담담한 목소리로 뭉클해지는 말을 전했는데, 이 말은 내가 가장 듣고 싶던 말 일 것이다. 나눈 적 없는 내 안에 깊은 바람, 진실한 글을 쓰며 무해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내 노력을 알아봐 준 것 같아 마음이 말랑거렸다.
무엇보다 모국어 책을 읽는 캐나다의 한국인 여성 이민자라는 공통 정체성이 우리를 더 뜨겁게 연결했다. 우리는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얼굴을 맞대고 좋아하는 시를 낭독하고 아끼는 책을 소개하고 서로에게 귀 기울였다. 삶과 글을 나누며 밤을 새고 남김없이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을 보냈다. 문정으로 쌓은 또 하나의 고향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