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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래 Jul 02. 2023

다 커서 구몬을 한다는 것

구몬 선생님은 성인을 싫어해




출장이 잦으시네요…^^


나는야 화요일마다 출장 가는 차가운 도시의 여성. 그날도 급작스러운 출장으로 선약을 취소하고, 바쁜 업무를 쳐내야만 했다. 거짓말. 나는 그저, 야근을 꿈꾸며 저녁 메뉴나 정하는 한낱 카피라이터일 뿐이고, 자고로 카피라이터의 출장은 3개월에 한 번 있을까 말까. 사실은 그냥 구몬을 못했다. 그냥 나는 구몬을 밀린 성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어젯밤 구몬을 다 해놓고 잘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할지 고민하긴 했다. 그 와중 구몬을 취소하겠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지만,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깨달았다. 안 되겠다.


구몬 일본어를 시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 광고 카피를 좀 더 보고 싶었고, 히라가나/가타카나는 대충 읽을 수 있으니 구몬을 하면, 자연스럽게 일본어도 능통한 카피라이터가 될 줄 알았다. 그렇게 화요일 퇴근 후 (라고 쓰고 ‘야근 시작될 때’ 이라고 읽는다.) 사내 카페에서 구몬을 했다. 거의 1년을 했고,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구몬을 밀리는 성인’이 되었다. 사실 성인이 돼서까지 구몬을 밀리게 될 줄은 몰랐다. 나의 구몬 역사는 무려 5살 때부터 시작되어, 5학년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정말이지 전쟁 같은 7년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주입식 교육이 그리웠던 나는 성인이 돼서 다시 구몬을 시작했고, 성인이 된 나는 완전히 다른 나일 줄 알았다. 그러나 완전히 오산이었다. 어릴 때는 구몬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서 억지로 구몬을 하던 아이였는데, 이제 무서울 것 없는 성인으로 진화해 당당하게 구몬을 밀리기 시작했다. 성인 구몬의 구몬 선생님은 무섭게 째려보지도 않았고, 매섭게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저, 안쓰럽게 바라볼 뿐. ‘네가 이 나이 먹고도 또 뻥을 치는구나…’


구몬은 계속 밀리고, 진도는 점점 나가 어려워지고, 나는 흥미를 점점 잃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교재에 읽을 수 없는 한자가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였을까, 내가 위염에 시달린 게. 아니, 위염에 시달렸다고 카톡을 보내고, 야근하면서 떡볶이를 먹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날 능숙하지만 무미건조하게 위로해 주셨다. 구몬 선생님으로서의 말보다는 의사/간호사/약사가 할 법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신 것 같기도.


성인 구몬은 진도가 굉장히 빠르다. 어릴 때는 똑같은 학습지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너무 지겨웠는데, 성인의 구몬은 정말이지 스피디하다. 선생님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구몬 선생님은 그러셨다. 내가 반복은 질색이라고 했으니까. 내 진도는 빠르게 흘러 어느덧 2단계 정도를 남겨두고, 나는 출장과 독감, 위염 등의 이유로 선생님을 안 본 지 3주는 됐을 무렵이었을까. 그 날의 화요일도, 구몬 선생님은 내가 ‘출장을 가서’, 나의 사무실 엘리베이터 앞 선반에 그 주의 구몬을 두고 가셨고, 한 10분 후 그 구몬을 꺼내려고 살금살금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였을까. 아주 큰 ‘현타’를 마주한 게. 나이 먹고서 어렸을 때도 안 하던 짓을 하다니. 이런 식이라면 언젠가는 나도 ‘구몬을 파쇄기에 넣어버렸다.’ ‘대표님이 화가 나서 내 구몬을 물어뜯어 버렸다’라는 SNS에서 떠도는 식의 어이 없는 핑계를 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못할 것도 없지. 웬만큼 현실적인 거짓말 소재는 모두 떨어지고, 구몬 선생님은 나를 ‘국내 출장이 잦고 일이 많아서 위염에 시달리는 불쌍하고 약한 영업직 여성’으로 알고 (속아 주고) 있으니까. 나는 그저 ‘야근을 많이 하고, 야식을 잘 챙겨 먹으며, 구몬을 잘 밀리는 사무직 카피라이터’인데 말이다! 내 손에 들린 구몬을 한 장 한 장 펼쳐보니,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없었다. 비극이었다. 


그렇게 나는 구몬을 끊었다. 성인의 구몬은 등록하기도 끊기도 참 쉬웠다. 어릴 때는 구몬 수학을 끊으면, 구몬 국어를 덤으로 받기 일쑤였는데, 성인의 그것은 끊기도, 밀리기도 참으로 쉬웠다. 아무도 강요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출장을 갔다고 하면 간 것이고, 아프면 아픈 것이었다. 심지어 구몬을 앞 집 코끼리가 다 먹어 버렸다 해도 별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진도상으로는 원어민이 되어 있어야 했지만, 나는 일본어 문장을 어설프게 읽을 수 있는 거로 만족하며 구몬과 헤어졌다. 끊고 나자 화요일이 다시 즐거워졌지만,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성인의 구몬이란, 그런 것이었다. 


P.S

선생님, 1년 동안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그런데요, 그때 이직해서 그만둬야 할 것 같다는 거, 거짓말이에요. 그 회사, 1년이나 더 다녔었어요.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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