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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래 Jul 02. 2023

임상춘은 이런 데 안 다녔대

천재를 롤 모델로 삼는다는 것




  내가 드라마 작가라는 걸 꿈꿨었던 시절은 바야흐로 열다섯, 지독한 덕질을 시작했을 때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신드롬에 가까운 드라마가 방영했고, 가까스로 본방 뒷북 열차에 탑승한 나는 드라마의 매력에 홀딱 빠져버렸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드라마의 매력이라기보다 현빈의 매력에 제대로 걸려버린 것인데, 그 시절 갓 스물넷이 된 현빈은 영롱하디 영롱한 나의 이상형이자,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 있지. 어쩜 저렇게 잘생겼다. 나는 열다섯, 지독한 중2병의 증상으로 약도 없는 상사병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드라마를 돌려 보고, 돌려 보다 대사를 외우게 되었고, 급기야 드라마가 끝난 이후에도 남아있던 극 중 현빈의 레스토랑 세트장에 방문까지 해버린 것이었다. 물론 집 근처였고, 종영한 세트장이었기에 소심한 여중생의 기가 차는 작은 나들이였지만 그곳에서 나는 다짐했다. 드라마 작가가 되리라. 그래서 쓰는 족족 명대사가 툭 튀어나오는 명작을 쓰리라. 그리고 배우는 꼭 현빈을 쓰리라. 오빠만 기다려 준다면. 그렇게 그 시절 블로그는 현빈 덕질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찬양하는 흑역사로 얼룩졌고, 그 시절 현빈은 흐려져도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조금씩 커져갔다. 그도 그럴 것이<내 이름은 김삼순> 드라마 대사를 나보다 더 잘 아는 비 관계자는 우리나라에 없을 것이라고 확실할 만큼 모든 편을 꼼꼼히 챙겨보고, 암흑의 경로로 대본도 구해 읽었으니까. 



그렇게 나의 스타 현빈은 더더욱 영롱해져 <시크릿가든>으로 고공행 진했고 그야말로 대스타가 되었지만 나는 해가 다르게 흑화되었다. 어떤 날은 왜 사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어떤 날은 절망적인 일이 너무 많았다. 드라마는 맑고 신나야 제맛인데 그런 걸 쓰기엔 너무 흑화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칙칙한 범죄 드라마나 기구한 인생을 다루자니 생각보다 그렇게 기구한 절망들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발적으로 드라마 작가의 꿈을 자연스럽게 떠나보냈다. 아무도 안 물어봤지만.



그래도 마음속에는 단막극 한 편은 내는 드라마 작가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은 있었다. 다행히 신기하게도 드라마 작가와 조금 비스무리한 일로 빠지긴 했었지만, 현생은 나에게 진짜 드라마 작가가 되는 틈 따위 주지 않았다. 현실은 너무나도 퍽퍽하고 매력 없으며 무미건조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반반차를 낸 날, 벼르고 벼뤄 둔 이태원의 어느 수프집을 혼자 드디어 간 날, 그를 만나 버린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에 귤이나 까먹으면서 가끔 봤던 <동백꽃 필 무렵>의 장면을 버스 안에서 보게 되었고, 정말 느닷없이 그에게 입덕해버린 것이다. 미담제조기로 불리는 그, 강하늘에게. 이 난데없는 덕통사고에 정신이 혼미해졌고, 그 이후로 나는 밤낮없는 덕질에 재입문 하게 된 것이다. 거의 15년 만에 다시. 역시나 본방 막차를 겨우 탔기에 복습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정주행에 정주행을 반복해서 완벽한 '동백꽃 세계관'을 세우게 되었다. 거의 15년 만에 당한 날카로운 덕통사고에 나의 모든 생체 리듬은 덕질이 중심이 되어 흘러갔고, 가련한 내 주변인들은 내 호소를 고스란히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또다시 나는 드라마 작가를 꿈꿨다. 하지만 나는 열다섯 보다는 어른스러운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였기에 현생을 버릴 수 없었다. 이제 현생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조금씩 써서 마흔 전에는 드라마 하나를 써야지. 게다가 강하늘은 작품을 선택할 때 대본만 본대, 대본만. 정말이지 참 배우가 아닐 수 없다. 그래 대본을 써서 강하늘을 만나자. 참으로 나는 한결같이 체계적인 망상 분자인 것이다.


그런데 <동백꽃 필 무렵>은 강하늘은 차치하고도 굉장히 훌륭한 드라마였다. 대사 빨이 이렇게나 좋다니. 나도 종종 대사를 써 내리는 일을 했기에 이런 게 얼마나 어렵고, 때문에 이 작가가 천재라는 사실도 대강 알 수 있다. 심지어 이 임상춘이라는 천재 작가는 그동안 히트 친 작품이 상당히 되는데도 대중 앞에도 나타나지 않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천재 작가.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인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이렇게 절절한 산전수전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도 30대 남짓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부러웠다. 그녀의 천부적인 글 빨도, 모성애가 절절한 이야기를 써 내리는 것도, 전역할 때쯤 수많은 대본을 받았을 강하늘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도. 그래서 롤모델을 삼기로 했다. 하지만 천재를 롤모델 삼는 것은 그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알았어야 한다. 일 하면서 그렇게 많은 똥을 싸지르고도 객관적 평가를 하지 못해, 나는 임상춘 작가를 감히 롤모델로 삼은 불나방 같은 존재였거늘.


체계적인 망상 분자인 나는 드라마 작가가 되어 강하늘을 주인공으로 써 보겠다는 일념으로 시나리오 학원을 알아보기로 했다. 왜 회사를 다니면서도 되게 은밀하게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들 있잖아, 예를 들면 <성균관스캔들>의 정은궐 같은. 직장인이지만 아무도 모르게 통장에 8억이 입금되는 삶.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필명은 뭐라하지, 혹시 누군가 작가 생활의 원동력이 뭔가요? 하고 인터뷰를 했을 때 ‘덕질’이요, 하면 너무 없어 보이려나. 정말 말도 안되기 짝이 없는 상상이지만, 실제로 난 상상마당에서 퇴근 후 영화 시나리오 수업도 듣고, 짧은 대본도 완성해서 종강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임상춘 작가가 되기에는 한없이 부족하여 여기저기 알아보았다. 


그러다 드라마 작가 학원에서 하는 어느 일일 무료 특강을 알게 되어 신청했다. 퇴근 후 산 건너 물 건너 간 학원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삼십 명 남짓 있었다. 그 중에는 작가를 진정으로 꿈꾸는 사람도 있어 보였고, 작품 하나만 터진다면 지금 하는 일을 당장 때려치우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덕질을 땔감 삼아 꿈을 만들어 내는 나 같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뭐라도 들어 보겠다고 끄적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이 임상춘 작가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나오자 귀를 세웠다.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드라마를 배운 것일까. 선생님이 해주신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날 들은 이야기는 이거였다. 대 임상춘 작가님은 그 흔한 새끼 작가도 없다는 것. (당연하지, 천잰데) 그리고 그녀는 이런 학원에서 글을 배운 적도 없다는 것. 왜냐하면 그녀는 천재니까. 하지만 우리는 천재가 아니므로 끝없이 이런 기관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 대충 이 이야기의 요였던 것 같다.


충격이었다. 왜 생각을 못 했을까. 그녀는 이런 곳 따위는 다니지 않았다는 것.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한 게 그녀는 천재이니까. 천재는 이런 곳에 다닐 필요가 없다. 이런 곳에 다니지 않아도, 그 흔한 새끼 작가 하나 없어도 제일 빛나는 글감을 발굴해내고, 명대사를 밥 먹듯 뽑아내고, 강하늘의 이목 따위 단번에 집중시킬 수 있다는 거. 왜 몰랐을까. 


그 이후에도 선생님은 어떻게 하면 평범한 우리네들이 공모전 뭐 이런 거에 뽑혀서 입신양명은 아니고, 이름 한번 올라가서 작가의 새끼의 새끼만 한 정도의 작가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야기해주셨다. 성공적인 무료 특강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학원을 등록했다. 심지어 대기를 걸어 놓아야할 지경이었다. 조용히 학원을 빠져나와 버스에 올라탔다. 


창문에 기대어 이름도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그녀(는 맞겠지)를 생각했다. 천재는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학원을 백 개 다녀도 작가가 될까 말까이지만 천재는 학원 따위 다니지 않는다. 울적해서 폰을 켜고 덕질을 했다. 이러나저러나 강하늘은 잘생겼다. 그러다가도 임상춘은 이런 덕질 안 해도 잘도 보겠지. 강하늘이 먼저 연락하겠지. 이런 허무맹랑한 망상에 또다시 울적해졌다. 때마침 학원에서 강의 등록 관련 문자가 왔다. 거칠게 지우며 읊조렸다.


안 간다, 이놈들아!!


당분간 아니, 있을 수 있는 한 최대한 오래 회사나 열심히 다니기로 했다. 고단한 퇴근길이었다.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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