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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보라 Dec 10. 2021

헤르만 헤세는 마흔에 시작했다.


아침 7시 라디오에서 오프닝 멘트가 흘러나왔다.

헤르만 헤세는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마흔에 그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늦잠으로 급하게 머리를 말리려고 하다 혼자 생각했다.

마흔에 시작했다고?

책도 유명하지만 헤르만 헤세 작가 미술 전시도 하던데.. 대단한 사람일세.

맞아. 시간 차가 있을 뿐 누구나 그림은 도전할 수 있는 거야.


그 생각을 하고 혼자 피식 웃었다.

누구나 그림은 도전할 수 있는 거야라고 감히 내가 말은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웃겼기 때문이다.

정말 미술을 싫어했던 학생이었는데 사람이 뒤늦게 철이 들면서 이리도 달라질 수 있는가 내 변화만으로도 참 신기하기 때문이다.




이번 주는 올해 미술 수업이 끝나고 맞이한 첫 주였다.

바쁘게 미술 수업을 가야만 했던 시간이 어색하게도 느릿느릿 가는 느낌이었다.

이 어색함을 무엇으로 지울까 생각하다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참 많이 변했다. 혼자 그림 그릴 생각도 하고.. 울 선생님이 아주 대견해하실 듯.


무엇을 그릴까 하다 책꽂이 구석에 도화지 몇 장을 발견했다.

예전 수채화를 잠깐 배울 때 받은 도화지와 그때 작업했던 그림들이 몇 장 들어 있었다.

그중에 코스모스 그림이 눈에 띄었다.


아.. 이 수업 때 선생님이 너무 꼼꼼하고 섬세해서 슬렁슬렁하는 내 스타일에는 참 곤욕스러운 5회 수업이었는데.. 그것도 3회까지만 가고 그 뒤로는 수업을 아예 안 갔던.. 씁쓸한 기분으로 기억되는 수업이었다.

그 3회 수업 동안에도 너무 숨 막히게 섬세해서 엄청 가기 싫었던 나를 치즈군이 등 떠밀어 다녔다.

결국 치즈군도 내 하소연에 동의했고 그냥 수업을 포기한 것이었다.

지금껏 퇴근 후 배우는 수업 중 처음으로 중도 포기한 수업이었다.


3회 수업 동안 견본 그림에 2B 연필로 쓴 메모만 봐도 그때가 떠오를 정도다.


그런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그때는 수채화로 어렵게 그렸지만 색연필로 그리는 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코스모스 그림을 그려보기로!


역시 꼼꼼한 가르침에 저절로 코스모스가 쉽게 그려졌다.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을지 모를 정도로 쓱 지나갔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

분명 선생님의 마법 같은 리터치가 있다면 멋지게 뽐냈을 텐데 살짝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프리즈마 색연필로 그린 코스모스.


원래 수업 시간에 그렸던 수채화 그림은 이랬는데 말이다.


2019년 11월 참 어려웠던 수업 시간에 그린 코스모스.


그때 저 그라데이션 부분을 엄청 지적받으며 배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선생님은 참 의욕이 높은 분이었을까.

겨우 5회 성인 퇴근 후 수업이었는데 미대 준비생을 가르치듯 하셨던 것 같다.

수험생이 그분에게 그림을 배웠다면 오히려 대단한 능력자로 멋지게 보이셨을 듯하다.




혼자 그린 그림.. 전보다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그려진 그림을 보고 있자니 나 스스로가 참 뿌듯했다.

느리게 보낼 것 같은 화요일 밤이 순삭 지나갔고,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꽉 찬 느낌이었다.

이런 게 그림의 묘미 아닐까..


헤르만 헤세가 마음의 치유로 그렸다는 그림이 이런 거 아닐까..

당분간 주 1회 그림을 그렸던 패턴을 유지해 봐야겠다.

그리고 선생님께 연락드리면 선생님께서 톡방에서 또 다른 가르침을 주시지 않을까..


그림.. 

무심하게 지나쳤던 배경이나 모습들을 세세하게 바라보게 되고,

집중도 잘 되고, 색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점점 매력에 빠져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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