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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 Jul 07. 2024

아침부터 박보검을 질투한 날

치앙마이의 어느 할 일 없는 일요일

수영과 무에타이 말고는 딱히 대단한 것을 한 것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요일이 오니 아침부터 뭔가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다. 저질체력에 어울리지 않는 빡빡한 운동 스케줄에 나름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쁜 마음으로 늦도록 덕질을 하고, 아침에 늦잠도 자야지… 했지만 아직 시차 적응 따위 되지 않아서 또다시 6시에 눈을 떴다. 일주일 내내 호텔 조식을 먹었지만 오늘만큼은 그간 쉬었던 위장을 채찍질해, 치앙마이의 온갖 음식들을 힘껏 먹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한 시간쯤 바보 같은 소리를 종이에 끄적이다가 7시 반에 호텔을 나섰다. 간밤에 미친 듯이 비가 온 덕분인지 이른 아침부터 화창하다 못해 햇살이 따가웠다. 덕분에 새로 장만한 양산을 요긴하게 썼다.


첫 타자는, 샨음식점. 미얀마의 북쪽 지역(인레호수 쪽)에서 샨 왕조를 이루고 살았던 샨족의 음식은, 대체로 미얀마 남부의 짜고 느끼한 음식에 비해 담백한 편이어서 미얀마 여행 중 한 줄기 빛이 되어주곤 했다. 숙소에서 도보로 대략 20분가량의 거리에 위치한 작은 샨족음식점은, 미얀마 수도인 양곤에서 들렀던 샨족 음식점과 내부 인테리어까지 흡사했다. (물론 그렇게 대단해 특별한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건 아니다.) 요리 하나에 40밧. 아침을 많이 먹는 편이라 두부국수 하나와 부침개 하나를 시켰다. 그렇지만 볶음 국수도 맛있는데… 하나 더 시킬까 망설이는데, 주인아저씨는 두 개가 맞냐고 확인하며 불안해했다. 솔직히 기억에 비해서는 평범한 맛이었지만,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바닥까지 싹 긁어먹었다.

배도 꺼뜨리고 커피도 마실 겸 조금 걷기로 했지만, 생각보다 걷기가 편하진 않았다. 인도는 수시로 끊기고 횡단보도에 신호등도 없어서 눈치껏 길을 건너야 했다. 다행히 치앙마이는 차량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고, 방콕이나 하노이 호찌민 뭐 그런 교통 지옥에 비하면 아주 한적한 수준이다. 물론 이렇게 비교하는 건 좀 반칙이다. 어디든 저 세 도시와 비교하면 한적하지 않겠냔 말이지. 아무튼 조금 걷다 보니 공원도 있고, 치앙마이 대학도 있었다. 대학 안에 있는 푸드코트 한쪽 커피 판매대에서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와 시럽이 뿌려진 토스트를 사 먹었다.


이제 배도 조금 꺼졌겠다, 근처에서 빵을 사가지고 들어가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인사이드 아웃’ 영화를 보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친구와 ‘인사이드 아웃 2’를 영화관에서 보기로 해서, 미리 봐 놔야 한다. 구글지도를 켜서 커피숍 주변의 베이커리를 검색하니, 인근의 ‘Dang Bakery’가 괜찮단다. 리뷰에는 대체로 ’ 싸고 ‘ 좋다는데, 내 미각은 딱히 대단하지 않아서 이 정도면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리뷰에서 추천한 밀크티빵을 집어 든 뒤, 아쉬워서 즉흥적으로 코코넛빵도 골랐는데, 사람은 역시나 선배님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밀크티 빵이나 두개 살걸. 돌아오는 길에 호텔 입구의 커피숍에서 ‘오렌지 커피’를 마셨다. 내가 좋아하는 태국 배우가 마시는 걸 보고 한번 마셔본 건데, 음…. 다른 데서 다시 한번 더 마셔봐야지.


맛있는 빵을 먹으며,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인사이드 아웃을 보았다. 다들 좋다는 인사이드 아웃을 보며, 감동받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중간에 어릴 적 친구가 죽는 장면에서 눈물이 나긴 했어도, 다 보고 나니 도무지 인사이드 아웃 2를 볼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나는 이런 이야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녀를 애지중지 대하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의 사춘기의 위기 등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보면 왠지 화가 난다. 저렇게 좋은 부모가 있는데도, 고작 이사를 해서 옛 친구를 만날 수 없다는 이유로 감정들이 요동을 치고, 급기야 아무런 감정도 못 느끼게 된다고? 고작 그런 일 때문에 가출을 한단 말이야? 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침대에 누워 최근 핫한 박보검의 예능 ‘가브리엘’에 대한 짧은 영상을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박보검이 처음 만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자신의 부모가 아닌데도 거의 당연하다는 듯 사랑을 주고받는 장면을 보고 순간 화가 난 것이다. 그건 그저 ‘저렇게 스스럼없이 사랑받을 수 있다니’ 싶은 그런 ‘부러운’ 감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건 확실히 ‘질투’였다. 사실 얼마 전에 친구가 누군가에 대해 질투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냥 부러워하면 될걸 왜 그런 마이너스의 감정을 가지지? 싶었더랬다. 질투가 어떤 식으로 느껴지는 건지 잘 떠오르지 않아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오늘 내가 느낀 감정은 확실히 질투인 것 같다. 내 감정을 말로 표현해 보자면 ‘내가 가지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 아닌, 애초에 내가 절대로 얻을 수 없을 것을 너무나 당연한 듯, 혹은 쉬운 듯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나 분노’인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따뜻한 가정을 가진 사람들을 조금 질투한다.


드라마나 소설, 영화 속에서 너무도 자상한, 근데 그게 당연한 부모와, 그런 부모와 마음껏 사랑을 주고받는 자식들의 이야기를 발견할 때면 그때마다 소외된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폭력을 당했다던가, 혹은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와의 관계에서는, 확실히 사랑받은 막내딸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들어와 집안을 뒤집는 아빠에게 시달린 엄마의 정신적인, 혹은 (아빠에게 대적함으로써) 실질적인 버팀목이 되어 엄마의 사랑을 받았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 지나쳐 한때는 도망치기까지 했을지언정, 여하튼 사랑을 받은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와 어떤 식으로든 이어졌다는 느낌이 드는 기억은 없다. 내가 과학고에서 떨어졌을 때, 아빠가 나를 위로한답시고 ‘너희 할아버지와 달리, 나는 네 학비를 다 대 줄텐데, 네가 무슨 걱정이냐.’ 하며 신세한탄을 하셨던 기억이 유일하니까.


아빠와는 늘 적대적이었고 서로 빈정대는 관계여서 차라리 편했다. 적당히 해야 할 책임만 다 하면 되었으니까. 다만 나를 조종하고 죄책감을 심어주려는 엄마에게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 일쑤였다. 결국 그런 부모와의 관계는 내가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절에서 명상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 덕분에 서서히 벗어나게 되었다. 어쨌든,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할 자유가 있으니 그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부모가 되지 못하는 것을 탓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나 역시도 내가 원하는 삶을, 이리저리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갈 자유가 있다고. 그래서 당시에 극렬한 교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 날짜를 잡아버리고 청첩장을 집에 우편으로 부쳐 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내 멋대로 한 결혼은 ‘것 봐라, 역시나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은 해선 안돼’라는 소리에 딱 맞게 망해버렸다. 젠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엄마와의 그 지독한 애증관계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엄마의 자살이었으니, 어찌 보면 너무 막장 결말이 아닌가 싶다. 나는 장례식에서 정말이지 정신이 나갈 듯 울어놓고, 막상 모든 절차가 끝나고 몇 달 후에 친구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 내가 지금 얼마나 후련한 기분이 드는지를 깨달아 버렸다. 엄마가 그립고, 엄마가 그렇게 자살을 선택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들고, 한편으론 왜 나한테 이런 기억을 주었는지 화가 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후련하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내 행동의 하나하나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온전히 내 자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슨 불효자식인가 싶긴 한데 그게 솔직한 심정이다.


또 얘기가 이상한 곳으로 흘렀다. 아무튼 인사이드 아웃 같은 걸 보면 그런 질투가 좀 든다. 하지만 뭐, 나는 나름 그 시기를 이것저것 버둥대며 잘 버텼고 이제 그 둥지는 떠나왔으며,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나만의 세계를 꾸릴 수도 있게 되었다. 지인들과의 대화 중에, 그런 드라마에 그린듯한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않은 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아픔을 이겨내고, 두려워하면서도 나아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그래도 ‘인사이드 아웃’은 나름 재미있었고, 박보검은 다정하고 사랑스러워서 내 애인 했으면 좋겠다 싶다. 나는 잠깐 엄마를 그리워하고 아빠를 조금 연민했다. 그리고는 배가 고파져서 오후 3시의, 절정인 뙤약볕을 뚫고 나가 인도 음식점에서 200밧(7500원)이나 주고 ’ 치킨 브리아니‘를 먹었는데 엄청나게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다시 두리안 카페로 가서 두리안 아이스크림과 두리안을 590밧(2만2천원)어치나 먹고 만족스러운 기분이 되어 배를 두드리며 돌아왔다. 결국 저녁 수영은 배가 너무 불러서 못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오늘도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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