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몬땐꾸로 할모니한테 가음지라데???? (누가 못돼가지고 할머니한테 고함을 지르냐!?!)
외할머니는 엄마보다 힘도 세고 목소리도 컸다. 내가 울면서 투정을 부릴 때면 천둥과 같은 소리로 나를 다그치셨다. 그래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나를 미워할 수 없어.' '할머니는 무조건 나를 사랑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나를 혼낼 때면 몰래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나를 때린다고(거짓말)고자질했다. 그러면 외할머니는 10분 만에 집으로 달려와 나를 달래주셨다. 할머니가 집에 들이닥쳤을 때, 나를 째려보던 엄마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할머니는 자식 교육에 대한 야망이 넘쳤다고 한다. 자식 셋모두를 음대에 보내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모든 집이 그렇듯이, 말썽쟁이 막내아들은 고등학교 때 탈주했고 첫째 딸은 음대에 입학했으나 사랑을 쫓아 졸업도 전에 결혼을 해버렸다. 유일하게 외할머니 뜻대로 자란 사람이 우리 엄마였다. 전교 학생회장을 하고, 제일 좋은 대학에 가고, 졸업도 하기 전에 취직을 하면서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던 엄마가 세상 한량과 결혼했으니 외할머니 성격에 속이 썩어났겠다 싶다.
나를 낳자마자 회사로 복귀해야 했던 엄마는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나를 맡겼다. 외할머니는 똑부러지고 당찬 사람이었다.나는 벽제 시골에서 그녀를 따라 구역예배를 다니며 동요보다 찬양을 먼저 배웠고, 엔카 가수의 노래를 뜻도 모르고 따라 부르기도 했다. 손녀에 대한 사랑은그녀의 교육열도 꺾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시절, 공부에 영 흥미가 없던 나는 시험지를 백지로 내기 일쑤였고 덕분에 반에서 꼴등을 면치 못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선생님은 외할머니를 학교로 호출했다. 이렇게 하다간 중학교에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자식 교육에 평생을 바친 외할머니가, 꼴등을 하던 손녀의 모습을 보고도 공부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던 것이 참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쭉 하위권에 머물렀다.성적의 가뭄 와중에도 간간이 가져가는 글쓰기 대회 상장들을 외할머니는 소중하게 보관했다.
"할머니 내일도 오실 거죠?"
"......."
그날따라 외할머니는 내내 딴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초등학생 손녀를 돌봐주기 위해 벽제에서 일산까지 매일 출퇴근하셨기 때문에 충분히 피곤하셨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1시간쯤 뒤, 외할아버지의 연락을 받았다.
"할머니가 탄 버스에 사고가 나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엄마한테 연락해볼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가벼운 접촉 사고로 생각하고 퇴근 중이던 엄마에게 병원에 좀 들러보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엄마가 사색이 돼서 집으로 달려왔다. 엄마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엄마 대신 택시를 잡아서 병원으로 가는데, 택시 기사가 한마디 덧붙였다.
"여기 뇌 수술하는 병원인데... 머리 다치신 분들이 가는 곳인데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엄마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현실 감각이 없었다.그날 그렇게 응급실에서 외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했다. 원인은 교통사고였다. 그녀는 교회 가는 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속도를 늦추지 못한 차에 치였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죽음'이었다. 뭐 이렇게 쉽게 사람이 죽을 수 있나 싶었던 것 같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만난 사람이 갑자기 이제부터 인생에서 사라진다는 게 감당하기 힘들어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발인 예배가 있던 날, 집안 어른들은 모두 예배에 가시고 나는 친할머니 옆에서 잠을 잤다. 친할머니는 잠에서 깨어난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셨다.
"간밤에 사돈이 꿈에 나왔어. 너희 외할머니 말이야. 우리가 누워있는 곳에 와서 니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더니 나를 보고 웃고 가시더라"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엄마는 본인의 엄마가 끝까지 손녀 곁에만 있다 갔다며 섭섭해하셨다. 나는...여러가지 후회가 밀려왔다. 마지막에 좀 더 인사를 씩씩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마지막 날 갈아주신 당근 주스를 투정 부리지 않고 맛있게 먹었으면 어땠을까. 오늘은 주무시고 가시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1년 뒤,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첫 중간고사에서 1등을 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가장 좋아할 분이 곁에 없었다. 합격이나 취직 등 때때로 마주하는 인생의 큰 이벤트들 앞에서 엄마와 나는 늘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 살아계셨으면 지금 벌써 동네에 현수막 걸었다"며 킥킥댔다. 그녀는 내 인생의 전무후무한 캐릭터였다. 사람에게서 이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늘밤 꿈에는당신이 좋아하는 엔카를큰 목소리로 부르는 외할머니가 나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