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석 Oct 01. 2015

저상(底床)버스에 관한 저상(佇想)

“돌려줘요 5516 저상버스” 캠페인을 시작하며


 사람들의 은근한 온기가 퍼진다. 어디론가 향하는 저마다의 설렘이 더해지면 버스 안은 더욱 활기차다. 차창 밖의 풍경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 거리의 인상만큼은 선명히 새겨지고 있을 것이다. 등굣길 버스에서 만난 친구들의 얼굴 위에 각자의 표정과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 길 위에 하루를 시작하는 기대와 생각들을 펼치고 있으리라. 소소한 일상의 풍경과 가벼운 사색이 쌓이는 공간. 그래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좋다.        



 누나도 5516 버스에 올라 등교하는 시간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고 했다. 본인만 태우고 가는 장애인 택시나 셔틀이 아니라, 버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풍경에 괜히 마음이 설렜을 것이다. 버스의 턱이 낮아진 만큼 다닐 수 있는 길은 많아지고, 이동의 단절 없이 길 위의 시간은 풍성해진다. 그래서 내게는 이 저상 버스의 존재가 장애인의 이동권리 문제를 넘어 하루를 채우는 삶의 문제로 보인다.     



 “이 버스(저상버스) 내일부터 안 다녀요.” 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어느 날 누나가 들었을 말이다. 더 이상 버스를 탈 수 없다는 말을 들었던 그 순간이 머릿속에 그려질 때마다 나는 함께 마음이 아프다. 5516 저상버스의 운행이 멈춘 2년 전부터 누나의 일상 속에서도 잠깐씩 멈춰야하는 구간들이 생겼다. 원하는 시간에 이동할 수 없고, 친구들과 함께 버스에 오를 수도 없다. 정문에서 내린 휠체어는 오늘도 인도와 차도 사이를 따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것이다.



 얼마 전에는 지체장애가 있는 친구와 근처 역까지 나간 적이 있다. 비가 내리던 날, 학내엔 저상버스가 없어 휠체어 바퀴는 가파른 길을 따라 정문까지 굴러갔다. 정류장 전광판에 ‘저상’이라는 노란빛 글씨가 떠오르기만을 기다리며, 우리는 눈앞에서 여러 대의 버스를 보냈다. 그들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문제들이 이렇게 친구와 함께 내 일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학내의 장애학생들을 위해 저상버스의 운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몇몇 학우들과 “돌려줘요 5516” 이라는 캠페인을 시작하게 되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동등한 권리. 이 말의 끝에는 당연하다는 생각과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동시에 맺힌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매일 이용하는 버스 하나에서부터 동등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이러한 문제들을 고치려면 귀찮은 일들이 생긴다. 돈이 꽤 들지도 모른다. 비장애인의 시각에선 보이지 않는 문제들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동등한 권리 실현은 머릿속에만 그려지는 이상적인 그림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상(理想)이란 현실과의 이상(異常)이 아니라 지향해야할 지점임을 상기해본다. 어쩌면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장애인 이동권의 완전한 보장이 아닌, 시도라도 해보자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장애학생들을 위해 저상버스의 운영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은 그 최소한의 시도에 포함되는 일이다.     



 저상 버스의 운행이 정지된 이유는 저상 버스의 낮은 턱이 학내의 과속방지턱에 긁혀 손상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저상버스는 지상에서부터 같은 높이만큼 떨어져 있기에, 학내 도로에서만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아마도 정해진 기준 없이 솟은 과속방지턱의 문제가 아닐지 섣부른 추측을 해본다. 구체적으로 물리학적 분석을 기술할 순 없다. 하지만 과속방지턱 높이의 어느 지점에는 분명 교통안전이라는 목적을 이루면서 저상버스에도 손상을 주지 않는 조화점이 있지 않을까?     


 등굣길 버스에서 휠체어를 탄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책 두께만큼 살짝 열어 놓은 차창. 그 사이로 서늘한 바람과 스치는 풍경들을 함께 맞이하고, 곧 들을 강의와 밤새 마친 과제 이야기로 버스 안을 가득 채울 수 있었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