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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석 Oct 02. 2016

숲의 성분에 관하여

시인 손택수의 작품과 함께 걷는 담양 여행

 댓잎이 흔들리는 소리에 귀가 시렸다. 나도 바람에 꺾이지 않고 몸을 튕기는 여유를 갖고 싶다. 모든 바람에 공평하게 몸을 맡기고 싶다. 텅 빈 속을 가져야만 겉은 단단해질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막 지도를 펼친 청년은 속에 담고 싶은 것이 많다. 무엇을 보고 담아야 할지에 관한 고민조차 가득 차오른다. 대숲은 어디로 걸어도 길이고, 이곳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바람이란 걸 언제쯤 깨달을까. 대나무는 불필요한 것들을 버렸다. 그래서 어떤 풀보다 단단한 마디를 딛고 하늘을 향해 솟아난 것이다. 대나무의 매끄러운 마디에 뜨거운 지문을 대어본다. 숨을 내쉬고 열기를 비웠다. 속을 비우지 않으면 다음 마디에 이를 수 없을 테니. 담양의 어느 대숲을 걸으며 곧게 선 풀들의 자세를 배운다.



 처음 담양을 찾은 것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였다. 오랜만에 학교를 탈출했다는 즐거움, 그리고 곧 헤어질 친구들과의 발걸음이 묘하게 교차하던 2박 3일. 남도의 명소들을 꾸역꾸역 집어넣은 일정 탓에 지명조차 몰랐다. 뛰어다니던 우리에겐 어디에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존재만으로 꽉 차있던 나이여서 그랬나. 계획된 여정이 아닌, 헤매기 위한 길을 떠난 지금. 지나치는 풍경 하나하나가 아쉽다. 길을 잃기 위해서, 샛길도 찾아본다. 앞이 아닌 위를 보면서, 또 옆이나 뒤를 보면서 걷기도 한다.  



 대나무는 단 한 번 꽃을 피우고 피운 뒤에는 죽는단다. 꽃을 피우는 데에도 6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꽃을 덜어낸 자리는 서늘한 공기로 채우고, 같은 리듬으로 흔들, 흔들. 그들 사이를 걸어갈 땐 나도 잡스러운 생각들을 잠시 덜어내야 할 것 같았다. 가슴 속 뜨거운 꽃을 억누르고 땅을 뚫는 줄기들이 숲을 받들고 있다. 담양에서 난 시인 손택수의 눈에도 터져 나오는 대꽃은 벅찬 것이었나 보다. 흔한 꽃 한 번 내주지 않고 깡마른 줄기만 남은 채 자라는 대나무가.


꽃을
참는다

다들 피우고 싶어 안달인 꽃을
아무 때나 팔아먹지 않는다

참고 있는 꽃이 꽃을 더 예민하게 한다면
피골이 상접한 저 금욕을 이해하리라

필생의 묵언정진 끝에 임종게 하나만 달랑 남긴 채
서서 입적에 드는 선승처럼 깡마른 대나무들

꽃이 피면 죽는 게 아니라
죽음까지가 꽃이다

억누른 꽃이 숲을 들어올리고 있다
생의 끝 간 데까지 뻗어올린 마디 위에서 팡 터져나오는 대꽃

- 손택수 <대꽃>


 대숲을 보고 내려오는 길, 강물을 따라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이 보인다. 튀어오르는 물  소리를 건지며 나도 다리를 건넜다.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는 이 순수한 형태의 다리가 반갑다. 징검다리에 박힌 돌 하나하나의 모양이 다르듯 건너며 마주하는 사람들의 사연도 하나하나 다를 것이다. 넓고 단단해 편안한 디딤돌이 있는가 하면 작고 흔들리는 돌도 있다. 나를 지나친 사람들은 나를 어떤 모양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인지.



 물을 건너면 관방제림이다. 200~300년을 한 자리에서 지켜온 나무들이 긴 천변을 따라 서있다. 당신이 정말 200년간 저 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습니까, 당신 안에는 아직도 200년 된 물이 한 구석에 흐르고 있나요 묻지 않아도 패인 자국과 꺾인 가지가 그 시간들을 대신 전한다. 하늘로 자란만큼 땅 속으로도 자랐을 굵은 뿌리는 나를 숙연하게 한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저 가지에 걸어두었을지. 오늘은 나의 이야기도 한 가지 위에 고이 올려둔다. 관방제림의 잎사귀 아래 나무 그늘, 또 그 아래에서 울고 웃었을 사람들의 사연이 더욱 커다란 그늘을 만들며 아직은 뜨거운 햇살을 가리고 있다.


대나무 가지에 국수줄기를 널어 말린다

멸치 육수 우리는 냄새에 강물도 둑을 넘을 때는 꼴깍
침 넘기는 소리를 내며 흐르는 뚝방
소쿠리 팔러 다니던 할머니와
어린 손주아이가 부은 발을 어루만지며 기다리던 음식이다

먼 항구로 일 나간 내 아비와 어미가
두고 온 아이를 생각하며 먹던 국수

팔려가는 어미를 따라온 송아지 젖꼭지 물고 울던 천변엔
그치지 않는 물소리가 있다

뚝, 막을 수 없는 설움까지 몇 그릇씩 뚝딱
비워내던 강둑이 있다

관방제림 그늘 긴 식도 따라 후루룩 빨려들어간다
나뭇가지에 감긴 강물도 면발처럼 미끈하게 흘러내리는 뚝방 국수

- <뚝방 국수>, 손택수


 담양의 특산품이 있다면 이 그늘일지도 모른다. 그늘의 성분은 새로 돋아나는 잎사귀와 그늘 아래 모인 사람들과 서늘한 공기와 그림자를 남기고 날아가는 작은 새들로 이루어져 있다. 손택수도 자신의 시에 관한 저작권을 다음과 같은 것들에게 돌렸다. “구름 5%, 먼지 3.5%, 나무 20%, 논 10% / 강 10%, 새 5%, 바람 8%, 나비 2.55% / 돌 15%, 노을 1.99%, 낮잠 11%, 달 2%” (손택수, 나무의 수사학 中) 그의 인생과 작품 세계는 담양의 하늘과 강, 노을에게 그만큼 빚을 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느새 그 성분들이 자신의 몸으로 스며들었을 그의 인생이 부러워진다.



 대숲의 풀들이 곧게 서있되 자유로이 흔들린다면, 관방제림의 나무들은 단단하되 긴 시간에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들른 메타세콰이어 길의 나무들은 어느 쪽도 아니다. 그래서 이 나무들의 비현실적인 모습은 어느 곳에서나 사랑받는다. 이 길의 나무들은 긴 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중히 줄기를 올려왔다. 이 나무들이 길에 시간을 새기는 방법은 따로 있다. 낙엽을 쌓는 것이다. 낙엽이 길에 구르면 사람들은 그 길을 밟고, 추억은 매년 길 위로 층층이 쌓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가을로>의 마지막, 이 길을 지나던 민주의 대사를 수첩에 적어두었다. “새로 포장한 길인가 보죠? 전에 있었던 길들의 추억이 다 이 밑에 있을 텐데... 사람들은 이제 그 추억을 안고 이 새 길을 달리겠죠. 좋은 길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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