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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석 Jul 30. 2021

바다는 지레 눈 감고

시와 함께 걷는 동해

그리움을 잠시 접어두고, 여행에서도 만남을 덜어내야 하는 요즘입니다. 길 위에서 새로운 인연을 찾던 낭만도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여행뿐만이 아니지요. 일상의 지탱하던 모든 것들이 조금만 더 버텨주기를 소망해야 하는 시절입니다. 차영호 시인은 ‘아름답다’는 말이 ‘앓음’에서 생겨났을지 모른다는 말을 했지요. 앓고 나서야 일상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마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그 시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가 어느 봄밤에 차를 몰고 나섰을 길을 저도 달려봅니다. 영덕에서부터 동해안을 따라 묵호까지 가는 길. 중간에 후포에 내려 동해를 만났습니다. 발가락 사이로 스미는 파도소리. 동쪽 끝 바다에 이르렀음을 실감합니다. 잔잔히, 또 거칠게 오는 파도를 세어보며 답답했던 마음을 열어봅니다. 또 다시 일상이 꽃피는 어느 봄밤이 오리라 기대해봅니다. 



아름답다의 ‘아름’이
병을 앓다의 ‘앓음’에서 생겨났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
(중략)
영덕 달산의 봄밤, 생각만 해도
복사꽃배 고동소리 봄밤봄밤 들리고
분홍 꽃분홍 서치라이트가 파―

바다는 지레 눈 감고
조각조각 쪼개지더군

차영호, <봄밤> 中




인적이 드문 바닷가였지만 혹시나 저의 방랑이 폐가 될까 싶어 두려운 마음도 컸습니다. 바다가 창틀에 들어오는 방 하나를 잡고 저를 잠시 가둬두기로 합니다. 묵호항과 논골담길 근처, 까막바위가 보이는 방입니다. 멀리서 점이 되어 꾸물거리던 배 몇 척이 느릿느릿 항구로 다가왔습니다.



이 항구와 연결된 바닷길 중에는 울릉도로 향하는 길도 있습니다. 창틀에 맥주 한잔을 따라두고 부러운 눈으로 오가는 배를 바라보았습니다. 시인 백석도 동해에 떠가는 배를 보며 파도 너머의 한 사람을 생각했다지요. 그가 서 있던 곳은 함흥이었지만, 동해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저의 마음도 겹쳐 봅니다.



내가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제주 색시를 생각하도 미역 내음새에 내 마음이 가는 곳이 있습네. 조개껍질이 나이금을 먹는 물살에 낱낱이 키가 자라는 처녀 하나가 나를 무척 생각하는 일과, 그대 가까이 송진 내음새 나는 집에 아내를 잃고 슬피 사는 사람 하나가 있는 것과, 그리고 그 영어를 잘하는 총명한 4년생 금이가 그대네 홍원군 홍원면 동상리에서 난 것도 생각하는 것입네.

백석, <동해> 中



동해 위에 그리운 연인을 둥실 떠올리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바다에 비친 옛 모습을 그리는 시인도 있습니다. 이동순 시인의 시집 ‘묵호’에는 바닷가 주민들의 애환과 소금기 어린 추억들이 가득합니다. 이 동네에는 묵호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이 많습니다. 묵호 등대, 묵호 시장, 그리고 묵호항까지. 묵호(墨湖)는 먹처럼 짙고 검은 바다를 뜻하는 이름입니다. 지금은 동해시라는 큰 지명에 삼켜진 이름이지요. 하지만 여전히 그 지명이 삶 곳곳에 살아 숨 쉬듯이, 이곳 사람들은 묵호에 얽힌 기억들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저녁 뱃고동 소리 들려오면
가뜩이나 먹빛 바다 더욱 검어지네
(중략)
혼자 먼 길 떠나간 지아비 생각하며
이 밤도 등대 앞에 나온 젊은 여인의 한숨 소리를 듣네
오래된 공동묘지 옆에 우뚝 서서
길 잃은 사람들의 앞을 밝혀주던 묵호 등대

이동순, <묵호 등대> 中


커튼 사이를 뚫고 오는 강한 햇살에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눈을 뜬 김에 일출도 보고, 묵호항 근처를 산책합니다. 묵호항 주변에는 곰치국을 파는 식당이 많습니다. 어젯밤 읽은 이동순 시인의 시집에도 이 칼칼한 한 숟갈이 등장했었습니다. 가난한 밥상의 한 구석을 늘 채워주곤 했다는 곰치국은 이제 제법 비싼 명물이 되었습니다. 한 숟갈 넘기며 그 시절의 기억을 다 좇을 순 없겠지만, 이 국그릇에 담긴 묵호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관광지로 바뀐 바닷가 식당에서 
그 옛날 추억을 떠올리며 곰칫국을 시켰는데 
문득 국물 한 숟갈 뜨노라니 
엄마의 도마 소리 
아부지의 불그스레한 얼굴 모습이 
국그릇 속에 그대로 보이는 것 같다

이동순, <곰칫국> 中



파도만 보다가 하루를 보내는 저와 달리, 같은 곳에서도 사람과 사랑을 떠올리는 시인들이 동해에 있었습니다. 어찌 하면 저도 그렇게 늘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지 스스로에게 되물었습니다. 교과서에서 자주 보아 익숙한 신경림 시인의 <동해바다 – 후포에서>에도 시인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바다라는데, 자신도 그렇게 사람을 품으며 살 순 없을까 하면서요. 시인들이 품은 그리움과 고민, 그리고 여행객들의 작은 생각까지도 모두 품어 동해 바다는 오늘도 깊고 푸르게 빛납니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다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신경림, <동해바다 – 후포에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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