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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Apr 04. 2024

글에 대한 생각


이런 걸 써보고 싶었다. 초록이 무성한 여름 나란히 걷는 우리에게 내리던 따스한 햇살, 풀벌레 소리, 네온사인이 불투명한 창문으로 번지는 가운데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괘종시계의 추, 이제 무너진 공간, 조금 늦게 알게 된 그럼에도 변한 것은 없던 진실, 하얀 욕심, 새 생명, 그런 장면들.


어떤 대화는 영혼을 메마르게 한다. 나에 대해 해명하고 싶어지는 순간마다 내가 해명하고 싶은 게 어떤 사실인지,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인지, 그 생각이 나의 반영이기는 한지 혼란스럽다. 세상을 다차원적인 평면으로 인식하는 듯 보이는 그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정말 그런 영혼의 모양을 지녔는지. 우리는 다르거나 같은지. 알 수가 없음으로 그저 나는 우리의 대화가 나를 소진시켰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상황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글은 나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지 않으며 내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지 계속해 되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전지대와 같다.발화되는 것들이 때로 그저 발화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청자에게 진심으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글로 쓰인 건 다수의 불특정 독자를 가지게 되고, 그것만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가지게 되므로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


글쓰기 수업을 들을 때면 서로가 써온 글에 대해 합평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글에 대해 관심을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점에 설렜지만, 우리가 결국 인간인 이상, 맥락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함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한 파편적인 정보를 제공하자 그들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 내 선택을 이해했고, 내 글을 해석했다. 나 역시 그들에 대해 알고나니 글을 읽을 때마다 그것을 지워낼 수 없었다.


나를 고정된 무언가로 정의내리지 못하는 게, 그래서 서로에 대해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이 판단의 유보라고 믿는 게, 그조차도 나의 특성인지 현대성 그 자체인지 모르겠다.


다만 그럼에도 글의 어떤 부분은 여전히 너무 나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은 나로부터 너무 멀어져 더이상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어놓을 수 없다고 느꼈다. 시라는 은유로 소설이라는 이야기로 나로부터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도 했지만, 시는 시여서, 소설은 소설이어서, 계속해나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듯 내가 무언가를 쓰고 싶다면 그게 무엇인지 가만히 응시하며 따라가기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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