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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Apr 29. 2024

잔잔한 날의 글쓰기


글을 쓰기 위해 하얀 창을 띄웠지만 나에겐 주제가 없다. 괜찮다, 나에게 필요한 건 홀로 앉아 커서가 깜빡이는 빈 창을 응시하는 시간이므로. 그러는 동안 나는 나로서 자유롭고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는 글은 행복하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에 기대어 글을 쓰지 않을 것이고, 나의 소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며, 그저 이렇게, 있을 것이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새소리, 잔디밭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한 번씩 웃음을 터뜨리는 얼굴 모르는 이웃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낮잠에 들었다. 그러는 동안 맑았던 하늘이 흐려졌고 이웃들은 돌아갔다. 나는 여전히 불을 켜지 않고 창 밖을 바라본다. 먹이를 노리는 육식동물처럼 소리 없이. 나는 다가가지 않는다. 낮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웅크리고 있는 것에 가깝다.


불을 켜고 문 밖으로 나아가면 일상이 있고, 정확하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내가 있다. 여기, 타인은 들여다보지 못하는 곳에는 나른한 내가 있다. 나의 공간을 생각하는. 한낮의 일요일 낮잠을 자고 일어나 흐린 날씨 어두운 방에 웅크려 글을 쓸 때 나의 공간은 어느 때보다 잔잔하다. 햇살 좋은 날 마당에 널어둔 빨래가 보송보송 말라가는 장면처럼.


그런 장면을 떠올릴 수 있는 날은 별일 없지만 좋은 날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메아리로 돌아오는 마음을 들으며 차라리 혁명가의 마음으로 산다면 모든 게 분명해질까, 어서 현명한 노인이 된다면 삶이 잔잔해질까, 무용한 상상력을 발휘 하지 않아도 되는 날. 제각각의 모양으로 떠다니는 마음에 붙잡히지 않는, 믿음의 부재 혹은 믿을 수 있는 능력의 부재를 탓하지 않아도 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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