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저들만큼 몰입해본 적이 있었던가?
찐 오타쿠의 시대.
내 주변에 오타쿠가 은근히 많다. 회사 사람들이나 가까운 사람들, 모두 오타쿠다. 대중적이라는 아이돌 오타쿠와 영화, 게임 오타쿠부터 딥한 콘텐츠로 넘어가면 웹툰/만화 오타쿠, 애니메이션 오타쿠 등 그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학사로 콘텐츠를 공부해본 사람으로서 이들은 어떤 경향성을 띄는지 은연중에 파악하게 되는데, 개중에는 꼭 오타쿠임을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가감없이 표현하고 드러내는 매력적인 사람들로 꽤 보여진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갑자기 오타쿠가 많아졌을까? 코로나의 영향은 아닐지 가설을 세워본다. 대다수의 외향형 인간들이 천재지변으로 인해 강제로 내향형 인간들의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바깥으로 쏟을 에너지를 안으로 쏟게 되니, 콘텐츠들에 몰입하여 빠져들게 되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오타쿠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문화로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애초에 오타쿠의 총량은 많아왔다. 그러나 이전에는 좀 혐오시하고 기피하던 시기가 있어서, 본인의 '덕력'을 굳이 사회에 드러내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냥 특정 커뮤니티에서 활동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산발적인 커뮤니티가 트위터 등 거대 SNS로 통합이 되면서 그 안에서 그들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올라왔던 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애석하게도 나는 오타쿠가 되어본 적이 없다.
TV 드라마나 영화, 게임 모두 몰입이 오래가지 못한다. 탄탄하고 매력적인 스토리에 빠져들다가도, 어느새 현실 세계로 돌아간다. 우리 회사 개발자와 디자이너는 소위 오타쿠들이라 통하는 구석이 많다. 그래서 종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자연스럽게 페이드아웃 되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주말에 어떤 애니메이션을 봤다, 이 인물 설정이 너무 재밌지 않냐. 가 그들의 주 이야기다. 디자이너가 무척 좋아한다는 '죠죠의 기묘한 모험'을 보다가 1화도 채 보지 못하고 꺼버렸다.
뭔가 나도 하나에 진득하게 몰입해보고 싶은데, 여유가 없어서 그런가? 생각이 많아져서 그들에게 살짝 이야기해보았다. 디자이너는 "당신의 관심의 방향이 하나의 스토리보다 다른 외부의 사건과 사물에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다." 고 넌지시 통찰했다. "본인은 세상 돌아가는 것에 썩 관심이 없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오, 그럴듯 한데?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실제로 나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너무 많았다. 예민하고 외부 자극에 쉬이 영향을 받는 탓에, 끈기도 부족했다. 꾸준히 공부를 하게 된 동기는 학문을 탐구하겠다는 순수 학구열보다는, 그래도 이 사회에서 이 만큼은 해야하지 않을까-나 이정도의 기대는 충족시켜야하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눈치와 경쟁의식이었다.
나는 가끔 오타쿠가 되고 싶다.
사는게 피곤해서 그런가? 나는 가끔 오타쿠가 되고 싶다.
물론, 세상 사는 일들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것도 꽤 좋은 일이다. 내가 원하는 아파트 청약에 타이밍을 맞춘다던가, 상승하는 종목에 시간 맞춰 투자 수익을 사수한다던가, 블랙프라이데이 선착순 할인을 기다리다가 제일 먼저 겟한다던가. 어디어디가 좋다더라, 이렇게 사면 호구라더라. 영민하게 사소하고 조악한 정보들을 모으다보면, 최소한의 손실을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사니까 몸과 마음에 피로감이 쌓인다. 그냥 어떤 날에는 넷플릭스 정주행을 하며, 만화카페에서 만화를 잔뜩 쌓아놓고, PC방 종일권을 끊어놓고- 아무 생각 없이 좋은 이야기에 정신을 맡기고 싶다. 정신없이 판타지 세계에 다녀오고 쉬다보면, 세상 살아가는 것에 더 기운이 나고 효율이 좋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잠깐 해본다만, 내 깊은 곳은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오타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진짜 오타쿠들도 내가 스스로를 오타쿠라고 칭해도 나를 끼워주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 검사했던 MBTI테스트에서는 분명 직관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던 N이었던 것 같은데, 사회생활을 한 뒤엔 원칙적이고 현실적인 S가 되었다. 주말에는 빽빽한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서 영감이 흐르는 곳에서 환기를 시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