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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telmen Nov 10. 2020

나의 작은 냉장고(2)

냉장고를 바꿨다. 600L짜리에서 270L가 됐으니 용량을 절반 이상 줄인 셈이다. 냉동고가 작아 얼음 얼리는 게 조금 불편한 것 정도를 제외하고는 괜찮다. 이전 냉장고는 8년 썼는데 아주 멀쩡해서 폐기하지 않고, 다른 세대들과 함께 쓰는 커뮤니티 공간에 기증했다.


냉장고를 바꾼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정수기를 설치해 냉장고서 가장 많이 차지하던 생수를 없애게 됐다. 플라스틱 조금이나마 안녕. 그다음이 음식을 비축하지 않는 삶에 대한 나름의 결심 때문이다. 대안을 위해 새로운 비용을 썼다는 아이러니가 있긴 하지만.


올해 봄 코로나가 한창일 때, 주 1회 이상 새벽배송을 시켰다. 동네 마트나 생협에서 구하기 어려운 샐러드 채소나 외국산 치즈 등을 손쉽게 살 수 있어 특히 좋았다. 냉동식품과 한데 배달해 꽁꽁 언 파프리카를 보고 분통이 터진 적이 있었는데, 상온 냉장 냉동 박스가 따로 구분돼 오는 업계 1위의 서비스에 탄복하기까지 했다.

그걸 분류하는 누군가의 노동은 애써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동선의 제약으로 인한 갑갑함, 자유에 대한 박탈감으로 인해 냉장고를 채우는 삶에 집착했던 것 같다. 그게 풍요인 줄 알았다. 내 아이 잘 먹이는 일에 기뻐하며 한때 유행한 '확찐자'라는 말에 집 없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 생각은 또 못하고 깔깔거리며 동조했다.

물류센터에서 연달아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을 때만 해도 인간이 대규모 집합한 공간의 비인간성 같은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하며 멈칫했으나 이내 나의 편의를 쫒았다.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사야 하고, 이를 위해선 클릭 몇 번이면 되니까. 그러나 택배노동자의 죽음. 하나도 아니고 열하나. 머리가 멈춰 섰다.


택배 분류작업을 했던 20대 일용직 노동자 A씨는 사망 당일 만보기에 5만 보가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일을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몸무게가 15kg이나 빠졌다. 첨단 물류센터의 현장을 취재했던 남편은 머리 위에서 수많은 적재 팔레트가 지나다니는데 안전모 하나 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근로자들을 보고 기함했다고 했었다.


사실 단지 새벽배송과 총알배송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므로.

모든 편리를 끊어내고 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범 택배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근로자고, 물건 사들이는 것을 좋아하는 소비자니까. 이미 세상 자체가, 일상의 모든 것이 물류다. 누군가는 새벽에 일해야만 할 것이다. 누군가는 원래부터 새벽에 일했을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처우나 안전에 대한 제도나 사회적 담론이 갖춰질 새도 없이 지금 새벽노동 시장이 너무 기형적으로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 다만, 내가 쉽게 누리는 것이 다른 이의 잠재적 죽음과 맞바꿀 만한 것인지 계속 불편하게 되새길 뿐이다. 택배 박스를 열며 누군가의 수고를 떠올리고과연 그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생각하고적어도 습관적으로 냉장고를 채우는 삶은 살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쇼핑이 언제부터 응급실과 경찰서처럼 야간에 급히 처리할 일이 되었나. 
나는 산들산들 장을 보고 집밥을 해 먹을 시간과 여유를 원한다. 별것 없는 우리네 인생도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하지만 죽도록 일한 하루의 끝, 몸과 정신은 너덜너덜해지고 장 볼 시간도 없다. 온라인 장보기를 하면 누군가 야간에 미치도록 일한 노동은 지워지고 물건만 깔끔하게 문 앞에 놓인다. 야간 노동은 국제암연구소가 지정한 2급 발암 요인이다.|고금숙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이 아이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열악한 부분을 최전선에서 만나는 거예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일상적인 폭력 안에 놓여 있어요. 일상적인 폭력이 수많은 종류로 뻗어 있어서 온갖 죽음으로 발현되고 외로움으로 발현돼요. 우리가 얼마나 무뎌져 있는지조차 모르는 거예요. 이게 이 사건의 본질 중 하나예요.|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우리는 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넘어진 자리에서 거듭 넘어지는가. 우리는 왜 빤히 보이는 길을 가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날마다 도루묵이 되는가. 우리는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는가. 우리는 왜 이런가.| 김훈 <우리는 왜..>



+ 시사인 변진경 기자의 글이 어지러운 나의 생각보다 훨씬 잘 정리돼 함께 추가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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