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thaul May 29. 2022

플레이그라운드

올바르게 사용한 정공법

오빠 아벨이 동생 노라를 꼭 껴안고 있다. 동생은 오빠와 헤어지기 싫지만, 학교에 가면 오빠와 헤어질 수밖에 없다. 오빠와 아빠가 몇 번이고 다독인 끝에 교실에 앉은 노라는 여전히 불안한 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아이들의 자기소개, 그리고 타이틀.


<플레이그라운드>는 타이틀이 떠오르기 전까지만 보면 '또 하나의 사회파 드라마구나'(이 사회파 드라마는 필자가 다르덴식 영화를 제멋대로 부르는 단어다)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그 규칙, 형식을 비슷하게 가져가긴 한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사소한 사건으로 열이 생기는 일상, 대사나 내레이션 대신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하는 감정 등. 그러면서 작품만의 특징을 중점적으로 형식화한다. 주인공 남매가 아직 청소년이란 점을.


앞에서 말한 오프닝부터 카메라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노라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담는다. 망원과 낮은 심도를 극대화해 노라가 인식하는 세계가 어떤 식인지 형상화한다. 어른들은 노라에게 눈높이를 맞춰주지 않을 때면 그저 배경일 뿐이고, 아이들도 노라와 친분을 쌓기 전까지는 그저 주변 소음에 불과하다. 이 화면들은 관객이 노라가 느끼는 두려움을 다소 극단적이다 싶을 만큼 간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화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구성한다, 가장 기본적인 태도를 정공법으로 사용해 훌륭한 효과를 빚어낸다.


<플레이그라운드>가 어디서 본듯한 드라마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건 문제의식이다. 영화는 아벨이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면서 점차 갈등을 쌓아간다. 그러나 이 갈등은 정작 생각보다 쉽게 해소된다. 영화가 관심을 기울이는 건 학교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 그 관계가 아니다. 그것을 유발하는 구조와 그것에게서 비롯되는 균열이 <플레이그라운드가>가 주시하는 부분이다.


사실 이 부분은 영화만 가지고 말하는 것보다 우리가 매일 보는 학교폭력 관련 뉴스들과 연결 짓으면 이해가 쉬워진다. 지속적인 괴롭힘은(비단 학교폭력이 아니라) 결국 매일 얼굴을 맞대야만 한다는 강제성이 있을 때 성립된다. <플레이그라운드>는 그걸 말로 표현하지 않고 노라와 아벨의 상황을 통해 전달한다. 쉬고 싶다고 쉴 수 없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의무적인 환경은 결국 이 폭력의 구성품이지 않은가 넌지시 묻는다. 그 여진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런 형식의 영화가 그렇듯, <플레이그라운드>도 확실한 해결에 당도하지 못한다. 이렇게 끝나겠구나 싶은 시점에서 화면이 블랙으로 전환되고, 어떤 음악이나 소리 없이 엔딩크레딧을 맞이한다. 새삼 잊고 있던 것, 이 영화는 처음부터 (아주 작게나마) 끝없이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플레이그라운드' 즉 운동장은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역동적인 생명들의 활기가 가득한 곳이다. 그 활기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며 균열됐고 끝내 커다란 침묵만을 남겼다. 이 영화로 마주하게 될 그 장면들은 우리에게 생경한 것이 아니다. <플레이그라운드>는 정직하게 장면을 정하면서 끝없는 질문을 남긴다. 그 질문이야말로 <플레이그라운드>가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단 하나의 것일 테다.



매거진의 이전글 퍼스트 러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