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푸레 Sep 22. 2022

어머니, 나의 어머니

2022년 6월 15일


1942년 가을, 어머니는 송탄의 작은 마을에서 10 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일곱 명의 아들들에게는 모두 공부를 시키고 유산을 골고루 물려주었지만 세 딸에게는 학업도 유산도 남겨주지 않아서 어머니는 국민학교만 겨우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누군가의 중매로 용인에 사는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고 두 분은 빈손으로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결혼 후 아주 춥던 겨울에 어머니는 나를 나았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해서 어머니의 자식은 아들 하나뿐입니다. 


남편의 뒷바라지와 아들의 양육을 위해 어머니는 한시도 몸을 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노동은 생존을 위한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두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고 난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어머니의 노동은 여러 형태로 바뀌었지만 모두 수입은 크지 않았고 몸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가내수공업, 외판원, 배달원, 가사도우미, 마트 운영 등 어머니의 노동력으로 가능한 거의 모든 분야의 직업을 가졌습니다. 아버지가 늙고 병이 들어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해지자 어머니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해서 아버지의 간병과 요양보호사 역할을 병행했습니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겼던 어머니 주변에는 늘 좋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어머니는 논리적인 사고를 정돈된 언어로 타인에게 전달하는 일에 능숙했습니다.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면 형제자매나 조카들이 언제나 먼저 어머니의 의견을 묻고 판단을 기다렸습니다. 어머니는 기억력과 숫자 계산이 빠르고 뛰어나서 젊은 사람들을 능가했습니다. 사고 전까지 어머니는 스마트폰을 손쉽게 다룰 수 있었고, 무릎이나 허리 등 관절이 불편했을 뿐 어머니 스스로의 육체를 건강하게 관리했습니다. 어머니 스스로에게 엄격했고 자식과 손주들에게는 관대했습니다.


일 년 전 겨울, 구청에서 운용하는 노인케어 일을 다녀오던 어머니는 버스에 부딪혀 머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사고 직후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옮겨져 뇌수술을 받은 어머니는 기적처럼 깨어났고 오랜 투병을 거쳐 지난겨울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의 강인한 몸과 정신력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 주어진 어머니의 평범한 일상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사고와 수술의 후유증으로 어머니는 다시 입원을 해야 했고 이후 어머니의 몸과 정신은 급격히 쇠잔했습니다.


어머니는 오늘 아침 두 달 동안의 투병을 마감하고 먼저 가신 아버지를 따라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지난 6월에 발송한 어머니의 부고를 여기에 기록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ITY 생지 출고 현장 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