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와 <윤희에게>를 중심으로
퀴어영화를 공부하면서 ‘가능성’이라는 말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나는 이 말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혹은 ‘아님 말고’라는 진지하면서도 될 대로 되라는 쿨한 삶의 태도가 가능성이라는 말에 내재해 있는 것 같아서다. 이런 점에서 모든 퀴어영화는 어떤 가능성을 타진하는 영화다. 사랑과 우정, 관계의 다양한 형태를 제시하는 퀴어영화는 이성애중심주의에 균열을 가하고, 섹슈얼리티의 민주화를 촉진한다. 내가 사랑하는 퀴어영화는 “널 이해할 수 없지만, 널 사랑할 수는 있다”라는 사랑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사랑의 가능성은 모든 멜로드라마에 통용된다.
<딸에 대하여>(2024)도 가능성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는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엄마는 딸이 적당한 남자를 만나 화목한 가정을 꾸렸으면 한다. 그렇지만 딸은 보란 듯이 엄마의 소망을 배반한다. 심지어 주거 불안에 시달리던 딸은 동성 연인과 함께 엄마의 집으로 쳐들어와 그녀의 마음을 짓찧는다. 세 여자가 한 공간에 불협화음처럼 놓인 이미지만으로 <딸에 대하여>는 어떤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를 빌리면, 세 여성이 공존하는 집은 대단히 수행적이다. 이 공간이 표상하고 있는 모종의 인위성이 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실감을 자아내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 <윤희에게>(2019)는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엄마를 회복시키는 딸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딸이 엄마의 성 지향성을 확실하게 인지하는 장면이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문제의 편지’를 먼저 열어 본 딸은 이상함(queer)을 느낀다. 이후 아빠를 찾아가 엄마와 왜 이혼했는지 묻는다. 아빠가 대답한다. “너희 엄마는 사람을 좀 외롭게 하는 사람이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로움의 수요자가 아니라 공급자다. 엄마가 발산하는 외로움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딸은 엄마와 편지를 쓴 주인공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주선하며 동성애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렇게 중년의 레즈비언 여성은 자신의 삶을 서서히 복원한다.
<딸에 대하여>의 가능성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주희(오민애)는 이층 양옥집에 살고 있다. 이층은 세를 주고 있고, 일층에 혼자 산다. 그녀는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는 딸 그린(임세미)이 돈 문제로 주거 불안에 시달리자 잠깐이라도 집에 들어와 살라고 권유한다. 그러자 딸은 자신의 동성 연인 레인(하윤경)을 데리고 온다. 주희는 그런 딸의 행동이 못마땅하다. 말하자면 그린은 레인과 함께 주희의 집을 마음대로 점령하고, 재영토화하는 중이다. 이 집에 무연고의 치매 여성 제희(허진)까지 합류한다. 제희는 주희가 담당하는 노인인데, 젊은 시절 많은 아이를 후원하며 봉사활동을 한 이력이 있다. 독신으로 산 제희는 말년에 병에 걸려 요양보호소 신세를 진다.
주희가 세를 준 이층에는 4인 가구가 산다. 남자와 여자는 아들과 딸을 낳아 행복하게 산다. 주희는 그들을 항상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가 된 주희는 레즈비언인 그린의 정체성에, 정확히 말하면 자신처럼 혼자서 외롭게 늙어갈 딸의 미래에 불안을 느낀다. 주희가 생판 남인 제희에게 지나친 정성과 호의를 쏟는 이유는 그녀의 얼굴에서 어렴풋이 자신과 딸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레인에게 묻는다. 왜 꼭 내 딸과 같이 살아야 하느냐고. 그러자 레인이 답한다. “어머님이 보시는 것처럼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요. 같이 있는 거, 그거 하나 저희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요.”
<딸에 대하여>는 주희와 그린 그리고 레인의 갈등을 메인플롯으로 삼는다. 아울러 지금보다 더 열악한 보호소로 강제 이전된 제희를 구원하려는 주희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해고된 동료 강사를 위해 분투하는 그린의 이야기가 서브플롯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제희를 향한 주희의 지극정성을 동료 보호사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동료 강사를 향한 그린의 지극정성을 주희는 이해하지 못한다. 둘은 왜 남의 일에 그렇게까지 나서느냐는 공격을 받는다. 둘은 똑같이 항변한다. 주희는 “어떻게 저게 남의 일이야. 우리라고 저렇게 안 될 줄 알아?”라고 반문하고, 그린은 “어떻게 그게 남의 일이야. 언제든 내 일이 될 수 있는 거야”라고 일갈한다.
주희와 그린은 나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일에, 명확하게 가시화하지 않은 것들에, 미래의 불안한 가능성에 저항한다. 퀴어연구자 전혜은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는 것들을 향해 우리의 운동을 열어놓는다는 것은 무책임함이 아니라 인식론적 겸손의 정치”와 “내가 타자를 다 알지 못하고 다 알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는 타자를 함부로 재단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성찰하려는 책임의 정치를 하려는 노력”이 두 사람의 행위에 내재해 있다. 이성애자 엄마와 동성애자 딸은 사실 이층 양옥집에서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타자를 위해 똑같은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주희는 다른 보호소로 강제 이전된 제희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세 여성은 제희를 살뜰히 보살핀다. 비로소 네 여성이 이층 양옥집에서 함께 하게 되었을 때, 영화는 딱 한 번의 마법을 부린다. 마당에서 그린은 이층에 사는 아이들과 함께 논다. 주희는 텃밭을 가꾸고, 레인은 빵을 굽는다. 제희는 낮잠을 자고 있는데, 레인이 빵을 먹으라고 그녀를 깨운다. 평화로운 어느 ‘특별한’ 가정의 주말 모습이다. 이 장면에서 네 사람은 처음으로 우울하거나 심각하지 않다. 빵을 먹으며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향해 웃는다. 제희가 빵을 먹다가 사레들리자 레인은 물을 가지러 부엌에 간다.
레인이 물을 가지러 부엌에 가는 장면 직후 낮잠 자는 제희를 깨우러 들어가는 레인의 모습이 다시 반복한다. 그러니까 앞서 서술한 풍경은 현실이 아니라 제희의 꿈이었다. 제희를 깨우러 간 레인은 그녀의 잠이 아닌 죽음을 목격한다. 제희의 꿈에서 펼쳐진 평화롭고 따뜻한 이미지는 평생 헐벗은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했던 제희를 위한 영화의 마지막 선물인 셈이다. 또한, 제희의 죽음을 먼저 발견한 것이 주희가 아닌 레인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늙어서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보라”던 주희의 말에 “왜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세요?”라는 레인의 대답이 바로 제희의 꿈 이미지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윤희에게>의 가능성
<윤희에게> 역시 <딸에 대하여>와 마찬가지로 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중심인물은 윤희(김희애)와 쥰(나카무라 유코)이지만, 그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인물은 윤희의 딸 새봄과 쥰의 고모 마사코다. 두 사람은 이 영화의 핵심적 메시지가 담긴 편지를 최초로 주고받은 사람들이다. 쥰은 “잘 지내니?”라는 말조차 윤희에게 건네지 못하고 20년간 편지를 가슴에 묻어둔다. 남자와 결혼 후 딸까지 낳아 쓸쓸한 삶을 보내는 윤희 역시 마찬가지다. 쥰을 대신해 마사코는 그 편지를 윤희가 있는 한국으로 보낸다. 그 편지의 수신인인 새봄은 윤희에게 대학 가기 전 같이 일본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마침내 윤희와 쥰이 오타루의 어느 운하 앞에서 만난다. 카메라는 그들의 만남을 멀리서 바라본다. “윤희니?”라는 쥰의 대사 이후 두 사람이 나란히 걷게 되는 장면까지,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그저 바라본다. 울다가 웃다가.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으면, 결국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장면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좋아하는 책을 다시 들춰볼 때와 비슷하다. 밑줄 친 구절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 “오랜만이네”라는 쥰의 말에 윤희는 “그렇네”라고 답한다. 두 말 사이의 괄호 쳐진 시간을 영화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윤희의 내레이션을 통해 설명한다.
<딸에 대하여>의 동성 커플과 달리 <윤희에게>의 동성 커플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간다. 중년으로 접어든 윤희와 쥰의 나이를 생각하면, 젊은 세대의 그린과 레인처럼 당당하게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밝힐 수 없었던 사회 분위기 속에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쥰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레즈비언 여성에게 “혹시 여태까지 숨기고 살아온 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기고 살아요”라고 말하며 더 이상의 접근을 차단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제일 마음이 쓰였던 캐릭터가 바로 이 여성이었다. 같은 레즈비언으로부터 거부를 당한 셈인데, 그가 받은 상처는 단순한 만남의 거절 이상이었을 거로 짐작된다.
또 마음이 쓰인 캐릭터는 윤희의 남편이다. 20년 전 윤희는 쥰을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강제로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 이후 오빠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일찍 결혼해 새봄을 낳았다. 원치 않은 결혼과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윤희가 느꼈을 외로움과 쓸쓸함만큼 윤희의 남편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왜 엄마와 이혼했느냐는 새봄의 질문에 그는 윤희가 자신을 너무 외롭게 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남편은 윤희에게 재혼 청첩장을 건네며 눈물을 흘린다. 두 사람은 서로의 행복을 간절하게 빈다. 윤희가 쥰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처럼, 그 역시 그럴 것이다.
<윤희에게>의 아쉬운 점은 지나치게 안전하다는 것이다. 쥰과의 재회 후 윤희는 새봄의 대학 진학과 함께 살던 곳을 떠난다. 윤희는 새봄에게 취직해 돈을 벌어 작은 가게를 열고 싶다는 소망을 전한다. 새봄은 그런 엄마를 응원한다. 하지만 영화는 더 이상 윤희의 섹슈얼리티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 새봄과 마사코가 주선한 윤희와 쥰과의 일회성 만남으로 섹슈얼리티 문제를 봉합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모르긴 몰라도 쥰 역시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 여성에게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앞으로도 계속 숨기고 살 것이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감안할 때, 그 문제를 가시화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사랑과 삶의 가능성
노희경 작가는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2008)을 통해 ‘사랑이 귀찮아질 만큼 삶이 버거운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은 버거운 삶을 등에 업고, 기어이 사랑을 한다. 사랑만이 버거운 삶을 찰나적으로나마 가볍게 해 주기 때문이다. ‘사랑이 귀찮아질 만큼 삶이 버겁다’라는 말은 퀴어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다르게 적용되는 것 같다. 무수한 사람으로 포위된 삶에는 퀴어의 사랑을 혐오하는 숱한 허방들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수의사로 일하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쥰에게도, 퀴어의 정체성을 숨기고 남자와 결혼해 딸을 낳은 윤희에게도 삶보다는 사랑이 더 버거웠을 것이다.
<딸에 대하여>의 그린과 레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는 퀴어의 삶 앞에서 저 문장을 ‘삶이 귀찮아질 만큼 사랑이 버거운 상태’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사랑이 귀찮아지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삶이 귀찮아지면 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삶과 사랑을 저울질하며 뭐가 더 중요한 것임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지속적인 혐오와 차별, 폭력에 노출된 퀴어들이 여전히 사회적 타살이라는 이름의 자살을 감행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좋은 퀴어영화는 퀴어들을 ‘살아도 되는 존재’ 혹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존재’로 부단히 긍정하는 영화다. <딸에 대하여>와 <윤희에게>도 그런 영화다.
참고문헌
전혜은 『퀴어 이론 산책하기』
이 글은 기획회의 617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