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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Feb 21. 2024

<괴물>이 타자를 긍정하고 환대하는 방식

시네마틱 쇼츠 01

카페에 앉아 창문 밖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가 있다. 수많은 사람이 좌우로, 앞뒤로 움직인다. 나는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연령도, 성별도 잘 분간이 안 간다. 그들이 멀리 떨어져 있고, 지속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은 창문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 어디론가 사라진다.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혹은 삶과 죽음. 이 같은 운동성은 인간의 본질과 맥이 닿아있다.


영화적으로 설명해보자. 그들은 롱 숏(long shot)에 의해 포착된 부단한 운동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롱 숏의 가장 큰 특징은 전경(全景)을 동반한다는 데 있다. 한눈에 바라보이는 전체의 경치. 내화면(on-screen)에 가득 담긴 가시적 풍경. 그것은 세상의 수많은 이미지 가운데 너무나 찰나적인 편린의 이미지이지만, 정확하게 실재하는 세계다. 그 세계에 우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롱 숏은 세계와 인간의 관계성을 탐문하게 한다.

  

롱 숏은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구성하고, 표면화하는가? 대상을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주지하다시피 롱 숏은 세계를, 공간을, 장소를 동반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단일한 인간이 아닌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을 포착한다. 그런 점에서 롱 숏은 공공성(公共性)을 담지하고 있다. 특정한 장소에 갇혀 지내거나,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사는 사회적 소수자들을 세상 밖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미나토와 요리가 존재하는 곳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에서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는 서로에게 각별한 감정을 갖고 있다. 그 감정은 사랑에 가까워 보인다. 중요한 것은 두 소년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이성애중심주의가 지배하는 학교에서 사람이 아닌 ‘이상한 존재’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두 소년이 학교가 아닌 곳에서 교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학생은 학교라는 장소에서 성실히 공부할 때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다. 남학생은 남학생답게, 여학생은 여학생답게 행동해야 사람으로 호명된다. 미나토와 요리는 이러한 궤도에서 이탈된 존재들이다. 요리는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한다.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히는 데 동참하지 않자 친구들은 두 소년의 관계를 의심하며 놀린다. 학교 바깥으로 내몰린 그들은 거리와 숲속, 고장난 열차 안을 전전한다. 그 이유는 학교가 동성애의 가능성과 결합을 억압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집도 사정은 비슷하다. 아들은 아들답게, 딸은 딸답게 행동해야 자식으로 인정받는다. 미나토 엄마는 아들에게 이성과 결혼해 화목한 가족을 이루라고 말한다. 죽은 아빠와 그렇게 약속했다는 것이다. 엄마의 억압에 의해 미나토는 집에서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요리 아빠는 아들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자 돼지의 뇌를 갖고 태어났다며 폭언을 일삼고, 학대한다. 학교와 집은 두 소년이 ‘진짜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공간이다.



미나토와 요리가 진실로 존재하는 장소는 집도, 학교도 아니다. 가장 안온함을 느껴야 할 장소에서 그들은 불안에 떤다. 두 소년은 사람(혹은 괴물)들과 유리된 공간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고장난 열차로 향하는 길목에 걸린 “나 있어”라는 문구의 표지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사실 두 소년의 보금자리인 고장난 열차는 비현실적 공간이다. 이는 두 소년의 존재가 세상으로부터 비현실적으로 규정당하고 있음을 은유한다.


학교에서 거리로 나온 미나토는 (아마도 친구들에 의해 신발을 빼앗겨서) 맨발로 걸어가는 요리에게 자신의 신발 한쪽을 건넨다. 이어 두 소년은 총총 걸음으로 뛰어가며 웃는다. 학교와 집에서는 불가능한 장면이 거리에서는 가능하다. 거리는 두 소년이 서로의 마음을 조금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하는 건 카메라가 거리에 있는 두 소년의 모습을 대부분 롱 숏으로 포착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카메라는 단일한 미나토와 요리가 아닌 ‘거리에 있는 미나토와 요리’를 지속해서 보여준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를 가시화하고, 그것의 지속가능성을 타진하는 롱 숏의 기능이다. 이 과정에서 두 소년의 사랑은 일종의 당위를 획득한다. 나는 이 같은 숏의 반복이 이성애중심주의에 균열을 가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롱 숏의 반복은 미나토가 동성애를 억압하는 학교에서 자신의 진심을 발화하는 ‘트럼펫 장면’을 가능하게 만든다.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


미나토는 교장 선생님에게 “좋아하는 애가 있어요. 그걸 말할 수 없어서 거짓말을 했어요.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들통 날까봐 말할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한다. 이에 교장은 “몇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건 행복이라고 하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고 한단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트럼펫을 분다. 카메라는 학교를 롱 숏으로 포착하며 트럼펫 소리를 넓게 담는다. 미나토는 학교에서 처음으로 웃는다.


앞서 카메라는 트럼펫 소리를 듣는 미나토 엄마와 호리 선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왜 이 두 사람이 트럼펫 소리를 들어야만 했을까? 미나토 엄마와 호리 선생은 각각 집과 학교를 대표하는 존재다. 그들은 미나토에게 ‘아들답게’와 ‘남자답게’를 강요한 인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미나토의 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들어야 했다. 트럼펫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고장난 열차로 향한다.


트럼펫 장면 이후 미나토는 죽지 않아도,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엄마에게 자신은 아빠처럼 될 수 없다고, 불쌍하지 않다고 토로하던 미나토가 온전한 나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미나토는 아빠로부터 학대당한 뒤 욕조에 쓰러진 요리를 구하고, 그들의 안식처인 고장난 열차로 향한다. 세상을 쓸어버릴 듯한 폭우가 그치자 두 사람은 열차를 나와 폐선된 철로 위를 달린다.


어떤 종류의 트래킹 숏(tracking shot)은 인물과 동행하는 느낌을 풍긴다. 앞서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하면서 인물의 보폭에 속도를 맞춘다. 이는 화면 바깥의 관객이, 화면 안의 인물과 함께 한다는 감각을 선사한다. 인물이 외화면(off-screen)으로 사라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동행하기. 나란히 걸으며 그 세상을 함께하기. 그런 점에서 트래킹 숏은 환대의 이미지를 생산한다. 이 숏이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된 장면이 영화에는 두 번 등장한다.


미나토와 요리가 신발 한쪽을 나눠 신으며 뛰어가는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자. 두 소년이 본격적으로 교감하는 순간인데, 이때 카메라는 그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측면 트래킹 숏으로 포착한다. 이 영화에서 사용된 롱 숏이 미나토와 요리가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면, 트래킹 숏은 ‘세상에 던져진 두 소년 곁에 카메라가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카메라는 관객의 시선일 수도 있고, 세상의 시선일 수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 미나토와 요리가 폐선된 철로 위를 달리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이때도 카메라는 트래킹 숏으로 두 소년을 포착한다. 카메라는 미나토와 요리를 뒤따르기도 하고, 앞서기도 하면서 결국 그들의 속도에 보폭을 맞춘다. 이 장면은 두 소년과 관객이 함께 달리는 이미지로 해석할 수도 있고, 두 소년의 속도와 세상의 속도가 합일을 이루는 순간을 형상화한 이미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타자를 긍정하며 환대하는 카메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대상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는 “카메라는 대상을 보여줄 뿐, 명명하지 않는다”라는 영화학자 장 미트리(Jean Mitry)의 논의와 맥이 닿아있다. 죽은 형의 빈자리를 견디며 살아가는 가족들(<걸어도 걸어도>), ‘진짜 가족’의 의미를 깨닫는 아버지와 아들(<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기적의 순간을 위해 모험하는 아이들(<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카메라는 거리에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주로 고정된 롱 숏으로 포착한다. 인물이 프레임 바깥을 벗어나도 바로 장면을 전환하지 않고, 그 빈자리를 계속해서 응시한다. 빈 공간이 먼저 주어지고, 인물들이 후속적으로 등장하는 연출 방식도 인상적이다. 이 같은 촬영 기법으로 인해 관객들은 ‘인간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과 ‘인간이 부재해도 세계가 지속한다’는 감각을 동시에 환기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는 6년간 키웠던 케이타(니노미야 케이타)가 자신의 친자가 아님이 밝혀지자 혼란스러워한다. 영화 후반부, 료타와 케이타가 가로수를 사이에 두고 교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때 카메라는 두 사람의 모습을 트래킹 숏으로 번갈아가며 포착한다. 이후 두 사람이 만나는 지점에서 카메라는 조금 멀리 떨어져 두 사람이 포옹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코이치(마에다 코우키)는 동생 류노스케(마에다 오시로)와 함께 별거 중인 부모의 재결합을 위한 여행길에 오른다. 마주 보고 달리는 신칸센이 교차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소원을 빌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신칸센이 교차하는 지점인 구마모토 현으로 향하는 아이들은 시종일관 달린다. 카메라는 트래킹 숏으로 달리는 아이들을 뒤에서 지켜주기도 하고, 앞에서 기다려주기도 한다.

  

정적인 롱 숏과 동적인 트래킹 숏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괴물>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거리로 내몰린 미나토와 요리를 구경하거나 방관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반복적인 롱 숏을 통해 서로 사랑하는 두 소년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관객의 눈에 아로새긴다. 트래킹 숏을 통해서는 미나토와 요리가 신발 한쪽을 나눠 신고 달려가는 순간과 마지막에 함께 뛰어가는 순간을 곁에서 지키며 동행한다.


어두운 밤에서 햇살의 축복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번 영화를 찍은 소회를 전하면서 “영화 너머에 존재하는 무엇을 믿는다”라고 밝혔다. 영화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폐선된 철로를 뛰어가는 아이들이 궁극적으로 향한 곳이 아마도 영화 너머가 아니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을 나서는 관객들처럼, 두 소년 역시 영화가 끝나도 각자의 생을 긍정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소년은 달린다.


“달리기는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나가는 일”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삶도 그렇다. 살아간다는 건 여러 악조건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며 나아가는 일이다. 꽃 이름을 잘 알아도, 어두움을 무서워해도 남자일 수 있다는 것. 누구나 자유롭게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종국에 두 소년이 깨닫는 것들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바다출판사)에서 “제 발밑의 사회와 연결된 어두운 부분을 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외부와 마주하고, 그 좋은 점을 영화 속에서 표현하는 것에 앞으로도 도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어두운 밤, 숲속을 홀로 걷던 요리의 발걸음에서 시작한 영화는 눈부신 햇살의 축복을 받으며 함께 뛰어가는 미나토와 요리의 발걸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의 도전이 또 성공했다.



* 이 글은 <기획회의> 601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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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전문지 <기획회의>에 1년간 '시네마틱 쇼츠'라는 코너명의 칼럼을 쓰기로 했다. 카메라 기법을 중심으로 영화를 설명하는 코너다. 평론가로 등단한 후 다양한 곳에서 칼럼 청탁을 받아봤지만, 카메라 활용 방식에 초점을 맞춰서 써달라는 요청은 처음이었다. '결국 영화는 카메라로 찍는 것'이라는 간명한 본질을 김혜경 편집자님이 알아주셔서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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