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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Mar 10. 2024

영화와 노동

켄 로치의 ‘영국 북동부 3부작’을 중심으로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라는 50초짜리 영화가 상영된다.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세계영화사에 기록된 최초의 영화다.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극영화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 화면 바깥(off-screen)으로 사라지는 단조로운 구조의 영화라 미장센이라고 할 만한 지점도 거의 없다. 다만 주목할 것은 최초의 영화에 등장한 인물이 ‘노동자’라는 점, 카메라가 그 광경을 고정된 상태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공장 문이 열리면서 시작하고, 닫히면서 끝난다. 연출된 장면이겠지만, 마치 기록영화의 현실적 풍경처럼 느껴진다. 카메라는 별다른 미동 없이 멀리서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담는다. 『쇼트』(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의 저자 엠마뉴엘 시에티의 말처럼, 초기 영화가 보여준 것은 어쩌면 영화가 아니라 ‘광경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하필 노동자였을까. 형식주의자들은 영화 속 인물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천착했다. 하지만 초기 영화는 어떤 인물을 재현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뒀고, 이는 사실주의 영화 미학의 토대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형성된 네오 리얼리즘(Neo-realism)이 대표적인 예다. 이 사조의 세례를 받은 감독들은 자연 조명, 비전문 배우, 거리 촬영 등을 통해 피사체를 사실적으로 포착하려 했다. 카메라의 개입을 최소화해 빈민들의 삶을 진실하게 그리고자 했다. 자전거를 이용해 벽보 붙이는 일을 하는 가난한 노동자의 비참한 최후를 그린 <자전거 도둑>(1948)은 네오 리얼리즘 영화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사실주의 영화는 ‘어떻게’보다는 ‘무엇을’ 바라보는지가 더 중요했다. 그 대상은 주로 노동자였다.


『시점』(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의 저자 조엘 마니는 “단일 시점 혹은 유일 시점을 하나의 항구적인 규칙으로 여기고, 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하나의 미학적 원칙으로 삼은 유일한 영화들은 바로 영화사 초기의 영화들”이라고 설명한다. 이 같은 논평은 지금처럼 카메라와 편집 기법이 발달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촬영된 초기 영화들에 대한 지나친 상찬일지도 모른다. 반복컨대 중요한 사실은 최초의 영화가 단일 시점으로 노동자들에게 포커스를 맞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895년, 공장을 나선 노동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노동자들을 환대한 켄 로치의 영화들     


켄 로치는 영국의 사회파 감독이자 ‘블루칼라의 시인’으로 불린다. 그의 영화에는 무명 가수, 버스 운전자, 건물 청소부 등 가난한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켄 로치는 그들을 사실적으로 포착하며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다. 그래서 그의 카메라는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며 윤리적이다. 다시 말해 그의 카메라는 영화의 표현주의적 아름다움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정치적·윤리적 태도에 더욱 천착한다. 사회고발적 성격이 강한 켄 로치의 카메라가 보여주는 이미지들 역시 영화가 아니라 ‘광경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켄 로치는 행동하는 목격자다. 주로 사회적 소수자의 편에서 삶의 부조리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듯 응시하는 그의 카메라는 ‘영화예술’보다는 ‘영화운동’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에는 복지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간의 쓸쓸한 얼굴이 있고(<나, 다니엘 블레이크>),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노동해야 하는 인간의 처연한 눈물이 있으며(<미안해요, 리키>), 조국을 잃어버리고 타국에서 뿌리내리려는 인간의 숭고한 의지가 있다(<나의 올드 오크>). 켄 로치의 카메라는 이들 옆에서 시대의 목격자이자 기록자처럼 뿌리내린 채 서 있다.


앞서 언급한 켄 로치의 영화들은 이른바 ‘영국 북동부 3부작’으로 불린다.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영국 북동부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이곳은 과거 수많은 탄광이 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산업 구조가 서비스업으로 재편되고, 탄광산업은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마거릿 대처는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펼치며 노동조합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이 지역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경우



다니엘은 심장병이 악화돼 목수 일을 관둔다. 실업급여를 받고 싶지만, 복잡한 절차 때문에 쉽지가 않다.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다니엘과 관공서 직원의 실랑이를 암막으로 표현한다. 암막이 제거된 후 카메라는 다니엘을 바스트 숏으로 포착한다. 바스트 숏은 TV 뉴스에서 많이 활용된다. 이 장면은 다니엘이 뉴스 앵커처럼 영국 의료제도의 맹점을 관객들에게 객관적으로 고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질병 수당이 끊겼다는 소식을 접한 다니엘이 직원과 전화로 말다툼하는 장면 역시 바스트 숏으로 촬영됐다. 이 장면은 1분가량 길게 지속한다.


일자리센터를 방문한 다니엘은 그곳에서 싱글맘 케이티를 만난다. 그는 런던에서 살다가 두 아이와 함께 뉴캐슬로 이사를 왔다. 사실상 런던에서 밀려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다. 2년간 노숙자쉼터에서 살다가 뉴캐슬에 자리를 잡은 케이티는 아직 이곳의 지리에 밝지 않아 예약 시간보다 조금 늦게 센터에 도착한다. 직원은 케이티가 예약 시간을 어겼다는 이유로 상담을 거부한다. 이를 지켜보던 다니엘은 분통을 터트리며 직원에게 열변을 토하는데, 카메라는 이 모든 장면을 거의 고정된 상태의 바스트 숏과 롱 숏으로 포착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들에서도 카메라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무료 나눔 가게에서 케이티는 직원의 도움을 받으며 물건을 고르다가 통조림 캔을 뜯어 내용물을 허겁지겁 입 안에 넣는다.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다. 이때도 카메라는 케이티의 눈물을 클로즈업으로 찍어내지 않고, 멀리서 지켜본다. 영화의 마지막, 다니엘이 화장실에 쓰러져 숨을 거둘 때도 카메라는 예의 그 정적인 움직임을 지속한다. 이로 인해 관객들은 인물들과 지속해서 거리를 두며 그들을 객관적으로 주시하게 된다.


<미안해요리키>의 경우



<미안해요, 리키> 역시 암막으로 시작한다. 기반 공사, 배수 공사 등을 비롯해 무덤 파는 일까지 해봤다는 어느 남성의 목소리가 암막 스크린을 통해 흘러나온다. 암막이 제거되자 관객들은 남성이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고 있는 상황임을 알아챈다. 바로 영화의 주인공인 리키다. 우락부락한 덩치의 면접관은 리키에게 “고용되는 게 아니라 합류하는 것”이라며 그럴듯하게 말한다. 택배 회사에서 일종의 개인 사업자처럼 일하게 될 거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카메라는 이 상황을 모두 고정된 바스트 숏으로 포착한다.


리키가 출근한 첫날, 분주하게 돌아가는 택배 회사의 모습을 카메라는 고정된 상태의 바스트 숏과 롱 숏으로 포착한다. 인물들은 바쁘게 움직이지만,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노동자들의 행동을 좌우로 고개를 돌리듯이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다음 장면에서 리키는 신속한 배달을 위해 잠깐 차를 갓길에 주차한다. 이때 경찰이 범칙금을 부과하려고 하자 리키는 “빡빡하게 굴지 말라”며 항의한다. 이 같은 두 사람의 실랑이를 카메라는 가까이에서 찍을 법도 하지만, 멀리 떨어진 채 고정된 상태로 바라본다.


영화의 마지막, 불량배들에게 구타당해 치료가 시급한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리키는 생계를 위해 차에 시동을 건다. 이때 가족들이 나와 리키의 출근을 말리지만, 그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친다. 켄 로치는 이 신을 잘게 쪼개서 빠른 호흡으로 편집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카메라 역시 리키의 양옆에 있는 아내와 아들을 좌우로 빠르게 포착할 뿐 여전히 고정된 상태로 서 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던 리키의 뒷모습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그 일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리키의 옆모습으로 끝난다.     


<나의 올드 오크>의 경우



<나의 올드 오크>는 영국 북동부로 이주한 시리아 난민들과 주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도 암막으로 시작한다. 암막이 걷어지고, 영화는 난민들과 그들을 혐오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흑백의 사진으로 나열한다. 탄광산업이 몰락한 뒤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이어온 주민들에게 난민들의 방문은 달갑지 않다. 안 그래도 싼 집값이 더 떨어질까 걱정이다. 다른 주민들과 달리 동네의 오래된 술집인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는 난민들에게 호의적이다. 영화는 TJ와 난민 여성 야라의 교감을 통해 두 집단의 공존을 모색한다.


사진 찍기가 취미인 야라는 올드 오크에서 TJ가 걸어놓은 광부 파업 당시의 사진들을 천천히 둘러본다. TJ는 광부로 일하다가 파업 때 실직했다. ‘우리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사진 앞에서 두 사람은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눈다.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야”라는 TJ의 말에 야라는 “시리아에 있을 때 우리도 그랬어요”라고 답한다. 이어 TJ는 야라에게 “노동자가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그걸 사용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덧붙인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대화를 별다른 움직임 없이 바라본다.


TJ와 야라가 노동자에 관해 얘기하는 장면이 영화에는 한 번 더 등장한다. 난민 구호 물품을 협찬받으러 가는 길에 두 사람은 마을에 있는 대성당에 들른다. TJ는 대성당을 가리키며 “대성당의 주인은 교단이 아니라 저걸 지은 노동자들”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전한다. 대성당을 돌아보는 야라가 처음 내뱉는 단어는 ‘아름답다’이다. 시리아에서 온 야라의 종교가 천주교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마도 그가 내뱉은 ‘아름답다’라는 단어에는 종교와는 무관하게 이 건물을 쌓아 올린 노동자들에 대한 경외가 깃들어 있을 것이다.     


영화의 탄생과 본질을 생각하게 하다


켄 로치는 위 영화들에서 주로 고정된 바스트 숏, 롱 숏, 롱테이크를 활용한다. 달리 말하면 그의 카메라는 노동자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넓게, 오랫동안 포착함으로써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를 이끈다. 요컨대 넓고 깊숙한 화면이 오랫동안 지속하면, 관객들은 수많은 피사체 중 어떤 것을 선택해서 예의주시할지 스스로 판단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이 같은 관객의 행위를 통해 영화는 모종의 객관성을 획득한다. 켄 로치는 카메라로 현실을 양식화하거나 굴절시키지 않고, 피사체와 거리를 둔 채 가만히 바라봄으로써 또 다른 현실을 완성한다.


『영화란 무엇인가?』(사문난적)의 저자 앙드레 바쟁은 이를 ‘공간적 깊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그는 “공간적 깊이는 관객을, 그가 현실과 유지하고 있는 관계보다도 더 가깝게 영상과의 관계 속에 둔다”라며 “따라서 영상의 구조는 그 영상의 내용 자체와는 관계없이 보다 더 현실성을 지닌다고 말하는 게 옳다”고 설명한다. 이어 “공간적 깊이는 연출에 대한 관객의 보다 능동적인 심적 태도를, 그리고 적극적인 관여까지도 이끌어낸다”라며 “관객은 적어도 최소한의 자기 자신에 의한 선택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관찰자적 시선의 고요한 카메라는 인물은 물론 서사와 숏의 크기를 확대한다. 확대된 영화 세상 속에서 관객들은 어떤 인물을, 어떤 서사를, 어떤 숏을 바라볼지 주체적으로 생각한다. 최초의 영화에 기록된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흩어짐을 그대로 자신의 스크린에 이어받은 듯한 켄 로치의 영화들은 영화예술의 탄생과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켄 로치는 현실 앞에 그저 가만히 카메라를 놓는다. 그의 카메라 앞에는 언제나 노동자 계급의 움직임이 있다. 모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영화를 만든 노동자들의 이름이라는 것을 그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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