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수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석주 영화평론가 Mar 13. 2024

<올빼미>가 계급적 욕망을 묘사하는 방식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만나서 교감(혹은 대립)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거기에는 아름다우면서도 기이하고 파괴적인 힘이 있다. 그 힘이 스크린을 경유해 관객의 눈으로 쏟아질 때, 영화는 심원한 호소력을 지닌 예술로 기능한다. 그 이유는 영화가 이데올로기적 예술이자 계급의 산물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소련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서로 대립하는 장면의 연쇄적 충돌에 영화의 힘이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그것을 ‘소비에트 몽타주’라고 부른다. 장면의 충돌은 계급의 충돌이다. 그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스파크가 영화다. 영화는 서로 다른 계급이 충돌하는 뜨거운 장이다.


<올빼미>도 계급에 관한 영화로 읽을 수 있다. 안태진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주맹증으로 중심을 잡고 그다음에 침술사와 인조 이야기를 가져왔다”라고 밝혔다. 영화의 물꼬는 인조(유해진 분)가 아니라 주맹증에 걸린 침술사 경수(류준열 분)가 튼 것이다. 그가 조감독으로 참여한 <왕의 남자>(2005)도 연산군(정진영 분)보다는 광대들이 극을 주도하는 영화다. 앞을 잘 보지 못하는 경수가 침술을 통해 인조의 운명을 좌우했다면, 장님놀이를 하다가 진짜 장님이 된 장생(감우성 분)과 예쁜 외모로 천자를 홀린 공길(이준기 분)은 의미심장한 풍자극을 통해 연산군의 운명을 좌우했다. 경수와 장생, 공길은 계급적 등가물이다.


계급적 차이를 발판으로 삼은 인물들의 이야기는 한국의 역사영화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잠시 광해군의 대리 역할을 맡았다가 ‘진짜’ 왕이 된 하선(<광해, 왕이 된 남자>), 관노의 아들로 태어난 노비였으나 중용되어 세종과 특별한 우정을 나눴던 장영실(<천문: 하늘에 묻는다>),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 정약전에게 바다의 생태 지식을 알려준 어부 창대(<자산어보>) 등은 모두 하층부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영화사에 최초로 재현된 하층부인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과 다르다. 하선과 장영실, 창대는 자신들의 신분에 비해 많은 것을 목격했다. 그렇다면 <올빼미>의 경수가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나?


경수와 소현세자의 이야기



경수는 궁에 가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으로 가길 희망한다. 그렇게 되면 아픈 동생의 병도 고치고, 기와집도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경수는 어의 앞에서 자신의 의술을 보여줄 기회마저 얻지 못한다. 이때 그는 화면의 원경(遠景)에 위치한다. 카메라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경수의 자리는 그의 계급적 위치를 반영한다. 어의가 만족하는 인재를 얻지 못하고 돌아서는 찰나, 경수는 환자의 걸음과 숨소리만으로 병세를 정확히 진단한다. 게다가 앞이 보이지 않는 경수는 내명부 마마들을 실로 진맥해야 하는 (경수의 표현을 빌리면) “요식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되기에 어의로부터 발탁돼 궁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올빼미>에서 가장 정서적으로 이완되는 순간은 소현세자와 경수가 만나는 장면에 있다. 낮에는 볼 수 없고, 밤에는 시력이 살짝 돌아오는 경수의 상태를 알게 된 소현세자가 “왜 볼 수 있으면서 못 본다 하였느냐?”라고 질문하자 경수는 “소경이 보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한다. 이어 경수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소현세자에게 “때론 눈을 감고 사는 것이 몸에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다 올곧게 보고 사셔서 아프신 겁니다”라고 덧붙인다. 이에 소현세자는 경수에게 청에서 가져온 확대경을 선물하며 “안 보고 사는 게 몸에 좋다고 하여 눈을 감고 살면 되겠느냐. 그럴수록 눈을 더 크게 뜨고 살아야지”라고 말한다.


다소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이 장면에는 계급의 격차가 무화되는 어떤 움직임이 있다. 이 장면이 있었기 때문에 경수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눈을 감고 사는 게 몸에 좋다고 믿었던, 팔자를 고치기 위해 눈을 감은 채 궁에 들어왔던 경수는 아프더라도 올곧게 보며 사는 길을 선택한다. 경수의 행동이 변화한 배경에는 소현세자에 의한 시혜적 차원의 교육이나 보살핌 따위에만 있지 않다. 앞선 대화를 살펴보면 두 사람은 동등한 입장에서 교감하고 소통했다. 결국 정의로운 이데올로기는 일방적인 주장이나 설교가 아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가치와 신념, 태도가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되는 의식 체계다.


인조와 소현세자의 이야기



<올빼미>는 인조가 어의를 시켜 소현세자를 독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야설에 기대고 있다. 역사적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폈던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을 위시해 자신을 몰아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늘 휩싸여 있었다고 한다. 소현세자가 청 황제의 칙서를 대독하는 장면은 부자의 파국을 처음으로 암시한다. 이 장면에서 소현세자는 인조의 자리에서 인조를 내려다 본다. 인조의 입장에서는 소현세자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올려다 본다. 왕과 세자의 자리가 역전된 것이다. 이때 인조는 풍으로 인해 일그러진 자신의 왼쪽 눈을 손으로 가린다. 이처럼 그는 영화의 결정적 장면에서 무언가에 의해 가려져 있거나 카메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인조가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래야만 왕위에 오래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영화가 시작하고 30분이 다 되어서야 모습을 보이는 인조는 빨간 발에 가려진 채로 등장한다. 발이 걷힌 후에도 그는 시선을 계속 아래로 향한 채 있다. 소현세자의 독살을 교사한 일이 경수에게 발각돼 인조의 후궁이 어의를 추궁하는 장면에서 그는 문틈 사이로만 모습을 보인다. 최 대감과의 극적인 담판으로 왕위를 부지한 인조는 자신을 고발하는 경수를 죽이라고 명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말을 듣는 신하는 아무도 없다. 이때 카메라는 인조를 익스트림 롱 숏으로 포착하는 데, 이 순간 그의 모습은 왕이라기보다는 패잔병에 가깝다.


잘 보이지 않아야 왕위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인조가 처음으로 밖을 나오게 된 계기는 8년 만에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영화상에서 인조를 내부에서 외부로,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잘 보이는 상태로 만든 게 소현세자라는 것이다.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본처가 낳은 아들(正嫡)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계급을 전복하고,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사람(政敵)이었다(공교롭게도 두 단어는 모두 ‘정적’이다). 소현세자가 인조로부터 죽임을 당했던 이유, 나아가 인조가 경수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조(경수)에게 소현세자(인조)는 그 자리(계급)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관객은 무엇을 보았을까?


역사영화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거울로 바라본 과거의 이야기다. 거기에는 당연하게도 오늘날의 계급적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대단히 민주적이지만 계급 상승의 사다리가 파괴된 사회에 살고 있는 관객의 욕망이 득실거린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주인공의 자리는 관객의 자리와 비슷하거나 같다. 주인공이 관객의 욕망을 대신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현세자가 죽고 4년 뒤, 경수는 침술사로서 꽤 성공한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죽지 않고, 계급 상승을 이룩한 사람이 경수다. 경수가 죽지 않은 이유는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다. 그가 관객의 욕망을 실현하는 대리자이자 관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엔딩 시퀀스에서 인조에게 시침하는 경수는 그를 쳐다보며 “무엇이 보이십니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경수가 관객에게 던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장면은 인조의 시점으로 촬영됐기 때문에 실제로 경수가 보는 것은 인조가 아니라 카메라이다. 인물이 카메라를 쳐다본다는 것은 관객을 쳐다본다는 말과 같다. 마침내 경수가 관객을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걸어온다. 관객은 영화 내내 무엇을 보았을까? 관객은 경수의 물음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계급의 균열과 갈등, 전복의 힘이 충돌하는 <올빼미>는 경수의 자리에 관객을 끊임없이 호명하면서 오늘날 한국사회의 계급적 욕망을 다채롭게 포착한다.



『2023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에 기고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와 노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