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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페이지 Aug 16. 2020

상처투성이의 철분 검사

2020. 8. 14. 금 / 241 days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다인이는 배방구를 참 좋아해. 엄마는 너와 눈을 맞추고 배방구를 예고해.


"다인이, 엄마 간다. 배방구 간다. 배방구 배방구 배방~구!"


하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인이의 배에다 엄마의 얼굴을 파묻고 최대한 입을 너의 배에 밀착시켜 한번에 뿌우우우웅하는 소리를 터뜨리는 거지. 미묘한 진동 때문일까 방귀 같은 소리 때문일까. 다인이는 기분이 나쁘다가도 이걸 하면 흐흐하고 바람 빠진 웃음을 짓기 시작해. 그러고 나면 다시 눈을 마주치고 앞선 행동을 반복해서 몇 번. 너의 웃음 톤은 점점 올라가며 어느 좋은 날에는 깔깔 넘어가는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 그러고 나면 엄마의 기분이 되려 힐링되곤 해.


요즘 다인이는 푸파 푸파 하는 소리를 입으로 내는데 혹시 엄마 아빠의 입방구를 따라 하는 거니? 너에게 물어보아도 아직은 답을 얻을 수 없어서 그저 궁금하기만 하네. 푸파 푸파 푸파 푸파. 벽을 잡고 걸을 때도 푸파 푸파. 바닥을 기어 다닐 때도 푸파 푸파. 엄마를 잡고 등산을 할 때도 푸파 푸파는 계속되고 있어. 그 와중에 오늘 너의 입방구를 최초 목격하게 된 것이지. 오롯이 엄마 혼자 말이야.


엄만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쉬고 있었고, 꺾인 다리를 다인이는 타고 오르고 있었어. 손을 아직 완벽하게 쓰지 못해 오르다가 미끄러지기를 몇 차례, 입이 엄마 다리에 닿았는데 예의 푸파 푸파를 한 건지 뿌우우우웅-하는 소리가 다인이 입에서 난 거야. 멍하니 있다가 엄마는 그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단다. 그리곤 또 신이 났지. 너 입방구 뀐 거냐고. 우리 다인이 새로 재주가 늘어난 거냐고. 본인이 해놓고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는 눈치야. 다인이는 엄마 다리에 입을 몇 번 더 대어보며 좀 전에 했던 입방구를 재현해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두 번의 성공은 없었어. 그리곤 이내 입방구를 뀔 수 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듯 푸파 푸파 거리며 벽을 잡고 노는데 심취했어. 아빠도 같이 보았으면 좋았을걸. 언젠가 또 볼 수 있겠지, 이런 명장면.


오후엔 새로 생긴 카페에 들러 유안이 가족을 만났어. 엄마랑 일로 만난 사이인데 동갑이라 친구인데 존댓말을 쓰는 재미있는 관계에 있는, 엄마 친구의 딸이 유안이야. 유안이는 다인이보다 4개월 늦게 태어났어. 하지만 년도가 달라서 동생이야. 다인이보다 9개월이나 빠른 윤아와는 친구인데. 우리나라의 나이 체계는 참 이상하지?


유안이네는 아가와 카페에 나온 게 처음이래. 백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럴 법도 해. 엄마도 백일이 될 때까지 개인적인 외출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지금은 카페도 도서관도 마트도 다인이를 안고 쉽게 가지만 그때는 어휴. 열심히 쑥쑥 자라줘서 고마워.


한 시간 정도 카페에서 음료와 빵을 즐기곤 집에 돌아오는데 이번에도 다인이가 카시트를 썩 편해하지 않는 게 느껴졌어. 휴.. 원더 윅스의 시작일까? 아니면 이제 슬슬 윗니가 나기 시작하는 걸까? 어느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밤잠을 설치는 게 신경 쓰인다며 아빠는 철분제를 사자고 했어. 철분이 모자라면 밤에 잠을 설친대. 그리고 철분 검사도 해보자더라고. 블로그를 찾아보더니 손 끝에서 피 조금만 뽑으면 금방 결과가 나오는 검사라고 해서 알았다며 병원으로 향했어.


아동 의원이었지만 입원실도 있는 제법 큰 규모의 병원에 도착했어. 우리가 늘 예방접종을 맞으러 가는 병원은 규모가 작은 의원이라 철분 검사가 어렵다고 했거든. 의사 선생님은 다인이를 살펴보시더니 철분이 부족해 보이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 검사를 해보자고 하시며 주사실 앞에서 대기하라고 하셨어. 다인이 이름이 불리고 주사실에 들어가면서도 그렇게 걱정되진 않았어. 가벼운 검사라고 했으니까. 다인이 팔에 고무줄을 묶고 간호사 이모는 혈관을 찾기 시작했어. 팔을 한 번, 다리를 한 번 살피더니 다시 팔에서 혈관을 찾아 링거 바늘을 꽂았어. 지난 6개월 동안 몇 차례 있었던 예방접종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엄마는 다인이를 달래는 일에만 집중했어. 괜찮아, 괜찮아 아가. 금방 끝날 거야.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 반복했지. 다인이의 조그만 팔에서 나온 붉은 피는 링거 바늘 끝에 맺혔고, 검사를 위한 양에 턱없이 못 미쳐서인지 간호사 이모가 너의 팔을 잡고 쭉쭉 밀기 시작하더라. 비닐 소스 팩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는 느낌으로 꾹꾹 누르자 너의 울음소리가 한층 거세졌어. 엄마가 널 꼭 안고 있었는데 벗어나고 싶어 몸을 이리저리 트는 걸 붙잡느라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어.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데 잘못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 그런데 문제는 링거 바늘에서 나지 않고 다른 곳에서 터졌어.


"어머니, 죄송한데 아기 핏줄이 터져서 다른 팔 한 번만 더 할게요."


핏줄이 터진다는 게 무슨 소린지 몰랐어. 엄마가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지금 꽂혀있는 링거 바늘에서는 더 이상 혈액 채취가 불가능하다는 것뿐이었지. 순간 머리의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어. 이걸 한 번 더 한다고? 아기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눈물 콧물 침범벅이 되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하지만 검사를 하려면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어. 7개월 아가의 손에서 혈관을 찾는 일이니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시작부터 그 동작이 너무 오래 걸렸던 것이 다시금 마음에 걸린 상태로 엄마는 계속 널 안고 있었어. 바늘은 네 피부를 다시 뚫고 들어갔어. 아빠는 그 장면이 네 눈에 들어갈까 봐 다인이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모르겠고 아프고 무서운 너의 기분이 오롯이 엄마에게 전해졌어. 엄마는 날 안고 있는데 행복하지 않다는 너의 발버둥에 비참한 기분마저 들더라. 바늘을 꽂고도 혈액은 바로 채취되지 않았어. 그 상태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겨우 혈액 채취가 시작되어 한 시름 돌리나 했어.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계속 말하면서 목소리의 톤을 올리는데 엄만 이 아이러니한 상황 때문에 눈물이 터져버렸어. 두 손은 너를 안고 잡고 있어서 얼굴을 타고 눈물이 줄줄 줄. 아빠는 어쩔 줄 몰라하고. 엉망진창. 그 와중에 혈액 채취하는 병이 바뀌었고, 어라 두병째.. 하고 생각하는 순간 힘겹게 받아내던 혈액이 멈춰버렸어.


끝난 건가.


간호사 이모를 바라보자 자기에게 널 달라고 하는 거야. 충분한 양의 혈액을 채취하지 못했다며 본인이 널 안고 한 번만 더 채취하겠다고. 뭐라고? 얼결에 널 넘기긴 했는데 이거 시발 더는 못하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어. 다인이 우는 거 마음이 아파서 수면교육도 실패한 사람들에게 이건 너무나 큰 시련인 거야. 아빠도 같은 생각이었나 봐. 잠깐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검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어. 다른 간호사 이모가 혈액을 조금만 더 채취하면 되니 한 번만 더 해보자고 아빠를 설득했고, 처음 다인이를 맡았던 이모가 아닌, 다른 간호사 이모가 바늘을 잡기로 하고 마지막 시도를 했어. 마무리를 하고 거즈와 반창고를 주사자국에 두르고 피가 멎으면 반창고를 붙이고 가야 되니까 3분 정도 기다리라는 안내를 받고 주사실을 나왔어. 후... 정말 못할 일이야. 철분 검사가 간단하다고 한 사람 누구야! 철분 검사는 정밀검사를 해야 해서 병이 두 개 필요하더구먼!


그 와중에 다행인 건 주삿바늘이 빠지고 나니 다인이는 웃음을 되찾았다는 거야. 엄마 아빠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어. 뒤끝 없다, 성격 좋다, 진짜 대박이다며 너에게 감사했어, 다인아.


검사 결과는 화요일이나 수요일에 문자로 알려준대. 검사 결과가 아무 일 없어도 억울할 것 같고, 무슨 일이 있으면 또 억울할 것 같고 그래. 상처투성이의 철분 검사였어.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니 밥을 지을 기운이 없어서 저녁은 피자를 먹었어. 오랜만에 먹으니 무척 맛나더라. 엄마 아빠가 피자를 먹는 동안 다인이는 그걸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어. 엄마 아빠가 먹는 건 다 맛있어 보이나 봐. 커다랗고 동그란 눈망울을 보고 있자면 나눠주고 싶은데 아직은 안돼. 맥주도 마찬가지야. 아빠가 유리잔에 맥주를 담아 들고 오자 손을 뻗어 잔에 코를 박다니 너무 이르지 않냐고. 미성년자를 탈출하면 아빠한테 술 배우자 아가.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만 뒤끝 없이 푹 잠들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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