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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듬 Jan 25. 2021

의도치 않은 휴식


제주에 58년 만의 폭설이 오기 며칠 전, 오른쪽 눈앞에 검정 삼지창이 왔다 갔다 했다. 계획되어 있던 서울행 일정에 안과를 추가했다. 결항으로 일정을 미룬 채 고립생활을 며칠 하고는 김포에 도착하자마자 십몇 년 전 라식을 한 병원에 갔다. 검사하더니 별일 아니라길래 그런 줄 알았다.


다음날 오전, 거의 앞이 보이지 않는 수준으로 갑자기 비문이 폭발했다. 심지어 검은색 추상화가 펼쳐졌다. 정보를 더 찾아볼 생각도 못 하고 다시 병원에 갔다. 전 날과 다른 의사가 (당연히 했어야 하지만 하지 않았던) 검사를 하고 망막 열공(그러니까, 구멍)이 생겼다더니 급히 레이저 치료를 했다.


추상화의 범인은 출혈 때문이니 서서히 가라앉기를 기다리란다. 그리고 충격적 이게도 이미 생긴 비문은 없어지지 않는단다. 사실 추상화가 너무 불편해서 이것만 없어지면 시야를 가득 채운 비문쯤이야 괜찮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제야 '쉽게 넘길 일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망막박리 카페에 가입해서 정보를 찾아보니 애초에 산동 검사를 안 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다음날 열공 치료를 바로 받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눈앞 추상화 모양은 매일 변한다. 명도도 달라지고 모양도 변한다. 초반엔 엄청 복잡한 추상화였다가 점점 형태를 갖춰서 어느 날은 돌고래와 오리였다가 어느 날은 우아하게 점프하는 발레리나를 품은 뷰티앤더비스트 포트 부인이 있다가 또 어느 날은 스누피였다가 다음 날은 찰리였다가 마티스 인물화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보름 동안 꼼짝도 못 하고 병원만 겨우 오갔다. 진료가 끝나면 앞이 하나도 안 보여 바로 옆 롯백이고 광화문이고 다닐 엄두도 못 냈다. 먹고 자고 제주에서 받은 귤 까먹으며 밀린 책읽아웃 듣는 것 만 했다.



지난주 체크업에서는 찢어진 부위가 더 찢어지고 있고 얇아진 부위가 더 있으니, 당분간 자주 보자는 의사 얘기를 들었다. 왜 병원만 가면 과를 막론하고 의사들이 자주 보자는 일이 벌어지는지. 덕분에 4일 계획으로 왔던 서울 나들이가 최소 5주로 늘어났다. 



그래도 이제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 동네 산책도 하고 새로운 빵집도 뚫고 스타필드 가서 도시의 맛도 보고 광화문을 슬렁슬렁 걸어 다니기도 한다. 최소 두 달은 가벼운 스트레칭도 금지라 온몸이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동네 산책에도 뻗어버리는 체력이라 지금 병가 중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다만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다.

엄마 집에 있는데 뭐가 그리 불편하냐 싶겠지만, 불편하다.


어릴 때 기억이 미친 듯이 몰려오는 것도 불편하고, 무언가를 만회할 기회를 대놓고 준 것 같아 불편하고, 내 속에 있는 적나라한 찌질함을 마주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나의 엄청난 회피, 방어 성향을 매일 같이 절감하며 이걸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생각한다.

동시에 사는 게 지옥이지.라는 말을 매 순간 떠올리고 있다.



언제 또 찢어지거나 박리가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로,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대학병원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사는 채로, 오지 여행은 꿈도 못 꾸고 산소통 들고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생각도 못 하는 채로,


이렇게 살아야 할 수도 있다니.

어디에 붙어 있는 건지 관심도 없던 망막이 나를 이렇게 쥐고 흔들다니.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병 이름들과 치료법을 알아 버렸고, 생각지도 못한 불편함과 통증을 얻었다. 손에 핸드폰을 들고도 타인에게 길을 묻고 버스 번호를 확인하던 젊은 사람들이 어쩌면 안과 치료를 받아 눈앞에 보이는 글자도 못 보는 상태였을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게 되었고, 실내에서도 썬글라스를 절대 빼지 않던 사람들이 어쩌면 눈앞에 날아다니는 비문과 추상화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겪어봐야 이해한다.

겪어봐야 알 수 있다.


사람이 이렇게 좁다.

겪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앞으로 대체 뭘 하며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 막막하지만 설 연휴까지는 먹고 자는 것만 할 거다. '그동안 몇 달 잘 쉬었잖아? 이제 뭐라도 좀 해야지.' 하고 움직이자마자 망막이 찢어지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그냥 제발 좀 쉬어!' 하고 몸이 보내는 싸인이다.


아니 왜 싸인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끊임없이 보내줘야 깨닫는 거지 나는? 휴




고도 근시 있는 사람들, 라식라섹한 사람들,

망막 아껴 쓰길(직장인이 어떻게 해야 눈을 아껴 쓸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들,

잘 먹고 잘 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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