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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듬 Sep 27. 2021

'여자'라서 겪는 일


몇 주 전, 백신 맞을 준비(그러니까 금주해야 하는 날짜를 따진다던가 뭐 그런 거)를 하다 애초에 날짜를 정할 때 생리통과 백신 후유증이 겹칠까 봐 주기 따져서 신청한 것이 생각났다.


업무 일정, 회의 스케줄, 남은 휴가 일수 뭐 이런 것에 추가로 주기도 따져야 하다니.


아니 왜 여자만?! 하고 광광거리다 남자들은 내가, 그리고 내 주변 거의 모든 여자가 살면서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지 모르는 모든 일들과 이로 인해 유발되는 긴장감과 불안감을 평생 모른 채 사는구나- 싶어 갑자기 맥이 풀렸다.



중고딩 내내 학교/학원 미친 선생들(생각보다 많은 인간들)이 교묘하게 수시로 행하는 성추행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지금 내가 예민한 건가? 하고 자기 검열부터 하고,


사람 많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맞을 뻔한다거나, 강남역 플랫폼에서 누군가 내 앞에 쿵 서더니 큰 소리로 욕을 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너무 놀라서 다리는 돌처럼 굳고 몸은 파들파들 떨리는 채로 서 있다가 한참 뒤에 정신 차리고는 죽지 않아서 다행이네 하며 말도 안 되는 (사실은 말이 되는) 셀프 위로를 하고,


기분 좋게 술 마시고 밤 11시에 택시 탔는데 집으로 가다 말고 느닷없이 핸들 틀어 한강 공원으로 거칠게 차를 모는 기사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미소를 띤 채 온갖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하지만 실은 머리가 하얘진 상태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제발 뭐라도 좀 하라고 속으로 다그치고,


 지하주차장에서 모르는 이가 4대나 되는 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한참 동안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어서 차에서 뭔가 하는 척하며 112 통화 버튼 누를 준비해두고는  인간이 차로 오기 전에 누군가 나타나기를 정말 간절히 바라고 있고,


시내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끌차로 길 구석으로 몰며 위협을 가한다거나, 누가 봐도 날 따라오는 모양새로 누군가 뒤에 따라붙어서 경보하며 걷다가 순간 머리를 굴려 운 좋게 잘 피했다가도 순식간에 긴장이 풀어져 길에 주저앉아 버리거나,


지하철에서 누군가 귀에 바람을 분다거나 갑자기 엉덩이를 만지고 지나가도 순식간에 사라져서 잡을 방법이 없고, 설사 잡는다고 해도 이 인간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지 안 받을지도 모르는 데다가 매일 다니는 지하철에서 또 마주치면 나에게 더 큰 보복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젠장 기분 더럽네 하고 넘기게 되는 그런 일들.


심지어 이 모든 일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행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유독 재수가 없어서 나에게만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이라는 것.


'여자'라서 겪는 일.



나에게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그때는 이렇게 이렇게 대응해야지, 하고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막상 그 상황이 되면 목소리조차 안 나오고 지금 피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고 저절로 생각하게 된다. 안 그래도 불안할 일, 신경 쓸 일 많은 마음 한구석에 디폴트 값으로 자리한 채 인지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끊임없이 불안감을 유발한다.



나는 어제 같이 회의 한 사람을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할 때도 종종 있을 정도로 사람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유독 저 인간들은 얼굴도 착장도 정확하게 기억난다. 당시에는 아 그래, 잘 피했어, 괜찮아, 하고 넘기지만 실은 뇌에 각인이 될 만큼 끔찍했던 일인 거다.



소개팅이든 선이든 할 때마다 어떻게든 서로 시간은 때워야 하니 가장 만만한 주제인 여행 이야기가 단골로 나온다.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에 여행지 이야기들이 몇 군데 나오는데 정말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늘 들었던 반응. '그 동네 위험하지 않나요? 역시 한국이 제일 안전하죠?'

'뭐 그냥 조심하면서 다니면 돼요' 답하고 넘기지만 실은 '이 사람아. 한국이 더 위험해. 공중화장실 갈 때마다 신경 곤두서봤니. 심지어 회사 화장실도 찜찜하다. 지하철 탈 때마다 신경 날카로워져봤니. 지하철 하루 최소 두 번은 타는데. 지하주차장 갈 때마다 두리번거리며 아무 일 없겠지? 하고 생각해 봤니. 길에서 마주 오는 누군가와 눈 마주칠 때마다 머리가 쭈뼛 서고 그 짧은 순간 저 인간이 때리려나 하고 자동으로 생각하게 되는 거 경험해 봤니.' 하고 말하고 싶다. 그동안 단련된 회사용 인격을 꺼내들고 참을 뿐.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만 안다. 그래서 약자를 이해하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약자가 왜 약자냐고 빼애애액 거리는 사람들은 머리가 나쁜 거다. 머리도 나쁜데 나태하기까지 하면 정말 답이 없다. 요즘 들어 내가 무심코 쓰던 단어와 말,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에 자주 괴롭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겠지. 이래서 인간이 죄인이라는 건가. 자꾸 생각하고 공부하고 삶의 범주를 넓혀야 한다.



아. 적다 보니 기억 저 편에 있는 일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는데 그만 생각해야겠다.

너무 지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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