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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듬 Jan 31. 2022

F코드 환자의 보통날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지나가는 날이 있다. 분명 어제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데 0.2배속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그런 날. 덕분에 한 장면 한 장면 선명하게 기억나는 날.


그날도 그랬다.


지하철 타러 가는 길, 몸이 무거웠다. 출근길에 그렇지 않은 날이 있겠냐마는 유독 힘이 들었다. 개찰구 앞에 서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남은 휴가 일수와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꾸역꾸역 열차에 탔다. 마당 구석에 박스째 얼어있는 귤을 정리하느라 약간 늦게 출발해서인지 평소보다 객실이 붐볐다. 출입문 바로 옆 구석에 몸을 쏙 포개 넣고 책을 들었다. 보통은 책에 정신을 쏟고 있다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우르르 타는 고속터미널 역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그날은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잠원역이라는 방송을 들으며 현실로 돌아올 채비를 했다. 몸이 납작하게 눌려 버릴 것처럼 그득그득 차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팔만 겨우 들 수 있는 최소한의 자리만 확보한 채 두꺼운 외투에 몸을 파묻고 핸드폰을 향해 목을 빼고 서 있는 모습이 좀비 떼 같았다.



헙.



스멀스멀 느낌이 왔다. 심장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느낌. ‘지금 지하에 있구나!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네!’ 하는 생각이 스쳤다. 못해도 만 번은 타고 다녔을 지하철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다들 매일 지하에 갇힌 채 일터로 실려가는 삶, 괜찮은가. 나는 아닌데.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 점점 숨이 가빠져 왔다. 공황이었다. 사람의 몸속에 이렇게 깊은 공간이 있을까 싶은, 심장 저 안 쪽, 빛도 산소도 없는 심해 같은 곳에서부터 서늘한 냉기를 가진 덩어리가 뻐근한 통증을 일으키며 서서히 올라왔다.



F코드 환자답게 불안한 마음과 눈물은 여전하다. 다만 이제는 대부분 집에 있을 때에만 나타나서 마음껏 불안해하고 마음껏 울어버리며 풀어낸다. 하지만 공황 증세는 좀 다르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버스에서도, 내가 운전하는 차에서도,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회사 회의실에서도 등장한다. 어릴 때부터 약한 공황 증세는 늘 있었다. 그게 공황이라는 걸 몰랐을 뿐. 공황장애라는 말도 없던 때였고, 속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는 아이였고, 털어놓는다 해도 들어줄 이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그런 줄 알았다.



서늘하고 뻐근한 기운이 목을 치고 올라와 입으로 숨을 가쁘게 쉬기 시작할 때쯤 교대역에 도착했다. 두 정류장, 5분도 안 되는 그 시간이 5시간도 더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차가 토해내듯 내보내는 사람 무리에 끼어 플랫폼에 발을 딛는 순간 ‘이제 괜찮아!’ 하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퇴근은 어떻게 하지. 지하철에서는 처음인데. 지상철 구간에서는 괜찮을까. 저녁에 공연도 가야 하는데. 공연장 지하에 있던데 어쩌지.’ 2호선을 타러 가는 동안 뇌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마음과는 다르게 뇌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 같이 느낄 때가 있다. 자주 그랬다. 밤새 뇌가 쉬지 않아 잠에 들지 못했다. 오랫동안 각성 상태로 살다가 탈이 났다.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 치료를 받고, 잠시 멈추어 침잠하는 시간을 보내며 점차 나아졌다. 현재에 집중하기. 호흡에 집중하기.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일을 하기. 끝없이 밀려오는 온갖 생각 구름들은 떠다니도록 가만히 두고 발걸음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사무실에 도착할 때쯤 날뛰던 뇌는 잠잠해졌고 호흡도 안정을 찾았다.



이제는 괜찮다. 여전히 종종 오열을 하고 불안에 잠기고 공황을 맞이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나에게서 몰아내야 하는, 없애야 하는 증상들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실은, 내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걸 안다. 잠깐 멈추고 큰 숨 한 번 쉬어 보라는, 몸과 마음에 잔뜩 들어간 힘 좀 빼 보라는 신호.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존재들이었지만 내가 땅에 발 붙이고 살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존재들. 눈물과 불안과 공황 덕에 오늘도 살아있다. 세상의 기준에 나를 맞추지 않고 내 마음 깊은 곳의 소리를 들으며 오늘을 살아낸다. 나는 괜찮다.



*F코드 : 정신과 질병코드



(22.01.16, 클럽스토리지-같이 시작하는 에세이 2주차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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