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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듬 Mar 10. 2022

살피는 마음


작년 3월, 마당에 볕이 따뜻하게 쏟아지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땅에 발붙이고 하늘을 볼 수 있는 집이라 좋았고, 옛 모습이 그대로 살아있는 동네라 더 좋았다. 누군가 지나가면 슬쩍 비켜서야 하는 골목, 누구 하나 지나치게 뽐내지 않고 조화롭게 모여 있는 집들, 여기저기 자리한 전봇대와 전선들. 정감 있는 동네라 골목골목 길고양이들을 자주 마주칠 거라 예상은 했다. 하지만 내 머리 바로 위에서 사는 아이들이 있을 거란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까망이와 대장이. 나보다 먼저 우리 집 지붕에 자리 잡은 동네 선배 지붕냥이들. 햇빛 잘 들어오는 자리에서 일광욕하다가 내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옆집 지붕으로 뛰어가던 아이들. 새로운 식물을 마당에 들인 날, 호기심이 경계하는 마음을 이기고 처마 바로 위까지 내려와 마당으로 뛰어 볼까 말까 고민하던 아이들. 새로운 아이가 나타나면 밤새 지붕이 부서져라 싸우며 자기 영역을 지키던 아이들.


나는 금세 얼굴을 익혔지만 아이들은 오래 걸렸다. 밥 챙겨주는 건너 집 대문 앞에서 열심히 먹다가도 내가 골목에 들어서면 자세를 낮추고 쏜살같이 도망갔다. 그 모습이 그렇게도 서운해서 조용히 ‘얘들아, 나야. 너네 집 아래 사는 사람이야. 겁내지 말아 줘’ 하고 듣지 못할 말을 건넸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살까 싶어 똥도 열심히 치우며 똥집사 역할을 했으니 서운할 만도 했지.


듣지 못할 말이고 알지 못할 행동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들에게 통했던 건지 이제는 도망가지 않는다. 골목에서 밥을 먹다가 마주치면 눈길 한 번 쓱 주고는 다시 열심히 먹는다. 마당에서 빨래를 탁탁 털어 널고 있으면 어디선가 호도독 걸어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날 좋은 날 툇마루에 누워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면 둘이 나란히 앉아 심드렁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그 간의 서운함이 싹 사라지는 순간들이다.



이번 겨울 유독 추운 날이 많아 아이들 걱정을 자주 했다. 지붕 위를 걷다가 미끄러지거나 다치면 어쩌지. 추위 피할 곳은 찾았나. 밥은 잘 먹었을까. 재택근무를 하는 날에는 수시로 지붕 위를 살피며 아이들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늦게 귀가한 날에는 지붕 위에서 소리가 나길 기다린다. 눈이 한껏 내린 날에는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 아이들 흔적이 있나 살폈다.


고맙게도, 까망이와 대장이는 알려주었다. 낮에는 방한용 뾱뾱이 때문에 밖이 보이지 않는 격자 문살 틈 사이 위풍당당한 그림자로, 밤에는 지붕 위를 타다다닥 뛰어다니는 소리로, 눈이 온 날에는 담벼락 옆 좁은 공간에 고고하게 남긴 발자국으로. 우리 잘 있다고, 춥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잘 살아냈다고, 그렇게 말을 건네주었다.



오랜 기간 내가 나로 살지 못했던 시간을 자책했다. 매일 하늘을 보며 자연이 주는 위로를 차곡차곡 받아들였다. 내가 나를 아끼기 시작하자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 가득했던 슬픔과 화가 덜어진 자리에 살피는 마음이 들어섰다. 지붕냥이들이 나의 단잠을 깨우는 시끄러운 존재가 아니라, 나도 오늘 하루 잘 버텼으니 너도 잘 지내보라고 위로를 건네주는 존재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살피는 마음이 계속 늘어날수록 내 마음의 지경도 넓어지고 우주도 확장하는 거겠지.


오늘 밤에도 그들이 주는 위로를 기다리고, 기대한다. 살피는 마음을 가득 채우고.


(22.02.13, 클럽스토리지-에세이 스탠드 1주차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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