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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Feb 27. 2024

권리에 대한 주장은 저마다 혐오의 목소리가 되어

기본적인 안전을 위협받을 때 우리는



염병이 한 지역 사회뿐 아니라 국가 간 교류와 유통 시스템 전반을 셧다운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실감해 가고 있던 2021년 겨울.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신을 맞고, 확진자가 발생하면 일사불란하게 대응하는 일에도 점차 익숙해져 가던 어느 월요일 아침이었다.  


아들에게 수학을 가르쳐주던 이웃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본인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이번에 자가격리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학조사 규정상으로는 지난주에 그 집에 가서 과외를 받은 아들도 해당이 되기 때문에, 아들 이름도 명단에 올려야 하는데 괜찮겠냐 물어왔다. 게다가 아들은 그 집 아들 A와 농구클럽에서 농구도 함께 하는 사이. A는 아직 검사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게 아니라 당연히 올려야 하는 게 맞았다. 그 길로 밀접촉자로 분류된 아들은 학교에서 조퇴하고 바로 자가격리 대상이 되었다. 전교회장 홍보와 유세 기간이었지만 아들은 분류되어 10일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다.  


다음 날 그 집 아들 A의 검사 결과가 나왔다. 확진. A반 아이들 또한 바로 귀가 조치 되었고, A와 함께 농구를 하던 아이들도 모두 신속항원 검사를 받으러 조퇴했다.


온 세상이 사상유래 없는 바이러스의 공격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지만 처음처럼 그렇게 마녀사냥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동네 커뮤니티에서는 신속하게 확진자 동선을 공유하면서도 지나친 공포와 억측으로 당사자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응원하는 메시지도 적지 않았다. 우리 모두 사상 초유의 위기에 그럭저럭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러니 A와 A 엄마의 확진은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체질과 면역과 위생 개념이 다른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닌 지 1년쯤 되었으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다 해도 딱히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잡음은 며칠 뒤 역학조사를 통해 A의 동선이 드러나면서 시작되었다. A는 1주일 전부터 감기에 고열이 있어서 병원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라고 했는데, 검사를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 사이 여러 학원을 전전하면서 밀접촉자의 범위가 일파만파 확산되었다. 그러다 보니 평상시 A 태도가 거론되었다. A는 방역에 아주 진지한 편인 학생은 아니었다. 농구시합을 하면서 숨이 아래턱까지 차도 절대 마스크를 벗지 않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가끔 턱마스크를 하기도 하는. 게다가 엄마가 바쁘다 보면 어쩌다 아들 건강에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1주일을 넘길 수도 있다. 엄마가 잔소리를 해도 아들의 위생관념을 단속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작은 부주의가 불운을 맞이하자 결함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A 엄마의 직업이 문제였다. A의 엄마수학 과외를 하면서 낮에는 어린이집에서 근무하는 교사이기도 했던 것. 하지만 평소 백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가족 모두가 백신을 맞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이미 백신 부작용은 널리 알려져 있다. 접종 후 뜬금없이 가슴이 뛴다거나 생리를 안 한다거나 머리칼이 빠진다거나, 하는 충분히 합리적 의심이 있었고, 심한 경우 어떤 이들은 건강하던 가족을 하루아침에 잃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자연면역을 실험하는 집단적인 움직임도 적지 않던 때. 감염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갑론을박하던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우리 집만 해도 매해 겨울마다 독감주사를 맞지는 않는다. 평상시 정부에서 집단적으로 동원하는 것에 조금 방어적이고, 건강에 좋다는 새로운 요법 같은 것도 불신하는 편. 하지만 '만의 하나의 확률' 때문에 내가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럴 경우 나 하나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의 일상을 마비시키고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 때문에 주사를 맞았다. 하지만...


어떤 집은 그 만의 하나가 내 가족에게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백신을 맞지 않았다.


몰랐던 것도 아니다. 이 일이 있기 전부터 우리는 그 집의 백신에 대한 태도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석에서 백신에 대이야기 나눌 때, 우리도 그때는 허허 웃으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서로의 신념을 존중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파생될 일을 상상하지 못하고, 서로의 이해관계가 구체적인 피해로 환산되지 못할 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평상시라면 충분히 존중받아도 될 만한 그들의 신념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하에서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그들을 전락시켰다.


개인의 다양성에 대한 관용적 태도는 늘 내게 숙제 같은 질문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개인의 신념은 그 누구에게도 강제할 수 없고, 누군가의 신념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으로 작동한다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기에, 그것이 내 가족과 관련된 안전을 위협할 때 특히 더 예민해진다. 더 나아가 집단으로 확대되면 일파만파 개인은 여과 없이 까발려지고 순식간에 비난을 는는다. 특히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이 작동하지 않을 때 대중은 더 사나워진다.


최근 저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우리 모두가 그때 못지않게 지금 기본적인 안전을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팬데믹 시절의 맹목적 공포가 느껴진다. 개인과 이익집단들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바쁜데 언론은 이들 각자의 사정을 제대로 전달해 주지 못하고 공론의 장은 배배 꼬인 갈등을 풀어내지 못한다. 가짜뉴스는 PCR 검사처럼 증폭되어 사회 전반에 서로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조장한다. 관용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와중에 개인들은 30% 이상 뛴 물가와 50% 이상 뛴 은행 이자를 감당하기 위해 오늘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살얼음판 위를 달리고 있다. 몇십 년간 우리에게 잉여자산을 축척해 주었던 부동산과 주식시장도 서서히 붕괴 중이다. 그 틈을 이용해 사기가 판을 치지만,  산사태 속에서 여전히 국가의 기능이란 찾아보기 어렵다. 10년 전 배 위에서와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


개인의 다양성은 관용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관용은 서로에 대한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개인이 각자도생 하는 사회는 점점 더 비도덕적인 각축장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이런 사실이 요즘 나의 노화보다 더 나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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