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살, 두 살 반인 나의 눈 안으로 그가 들어온다. 눈동자를 지나 어린 소녀의 마음속에 슬그머니 스며들어 구멍을 파고, 소굴을 짓고, 은신처로 삼는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시간에도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 무엇도 그 자리를 대신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무엇도 그렇게 멀리 내려갈 방법을 알지 못한다. 나는 두 살 때 가장 자랑스러운 연인과 함께 내 사랑의 여정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의 연인들은 그 누구도 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며, 결코 그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첫사랑은 늑대다. 털과 냄새와 상앗빛 누런 이빨과 미모사 같은 노란 눈, 산처럼 풍성한 검은 털에 노란 별빛의 반점이 있는 진짜 늑대. (p.9)
어느 날 밤. 부모님은 트레일러 집에서 비명을 지르며 나온다. 뒤이어 어릿광대, 곡예사와 여자와 아이들이 모두 흩어져 나를 찾기 시작한다. 곧이어 나는 늑대 우리 안에서 발견된다.
두 살의 나는 오줌으로 누렇게 변한 짚 위에 누워, 작은 머리를 늑대 배에 대고 잠을 자고 있다. 해맑고 행복한 잠. 단원들은 '늑대와 함께 있는 어린 소녀‘라는 그림 앞에 반원으로 둥글게 서 있다.... 아버지가 나를 데려가려고 우리에 다가서자, 늑대가 머리를 든다. 오로지 머리만. 마치 나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배나 발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다가서자 으르렁 소리는 더 커지고, 더 또렷해진다. 이빨은 잇몸까지 드러난다... 그들은 기다리기로 한다. 늑대가 잠들 때까지. 나는 차가운 첫 햇살의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선다. 늑대는 조심스레 물러서고 우리의 다른 구석으로 가서 마땅한 휴식을 취한다. 나는 곧바로 빠져나오지 않고, 철장 건너편의 사람들과 그들의 핼쑥한 얼굴을 쳐다본다. 순진무구한 잠으로 가뿐해진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노래한다. 누군가가 나를 붙잡고 볼기짝을 두 번 때린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트레일러 밖으로 못 나가게 한다. (p.12)
2. 내 이름은 뤼시, ‘빛’이란 뜻이다
_ 그러니 내 대모인 빛을 따라 쉬지 않고 움직일 밖에.
나는 여덟 살부터 열 살까지, 여섯 번의 가출을 한다. 곡마단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동할 때, 트레일러가 첫 번째 빨간 신호등에 멈추면 곧바로 뛰어내려 건물들 속으로 사라졌다. 내 이름은 뤼시. 빛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그러니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움직일 밖에.
딸이 가출 후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아버지는 침묵하고 분노는 어머니에게 떨어졌다. 어머니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혼돈의 원인이고 유일한 책임자다. 하지만 수많은 비난 앞에서도 어머니는 웃음만 터뜨린다. 고양이, 참새, 넝쿨식물, 소금, 눈, 꽃가루를 닮은 어머니. 아버지는 매번 어머니를 죽여 버릴지 아니면 입을 맞출지, 두 욕망 사이에서 망설인다. 어머니의 유쾌함은 전염력이 매우 강해서 트레일러 근처에 도착한 무리는 이제 미친 듯이 웃어댄다. 방탕한 아이는 그렇게 돌아온다. (p.55)
3. 기숙사의 여자들
_ 대모 농샬롱 아줌마 이야기
열 살과 열일 곱 살 사이에, 내 마음은 바람이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나온다. 나는 내 마음을 통과했던 사람들의 리스트를 수첩에 적는다.
위생에 대한 강박을 빼면, 대모 농샬롱 아줌마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가 자신의 이혼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결혼 생활은 3년간 이어졌어. 남편 목소리에 엉뚱한 음들이 나타나던 날까지였지. 중요한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최악인 게 있었는데, 내게 하는 말이 냉랭해지기 시작한 거야. 모든 건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됐어. 어느 날 친구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해서 준비하는데, 내가 옷 입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 남편이 짜증을 내더라고. 나는 우리 사이가 끝났다는 걸 바로 깨달았지. 그러고는 인생은 짧은데 이렇게 형편없는 가수와 남은 생을 함께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를 비난할 만한 건 별로 없어. 그냥 목소리에 다정함이 사라지고 무성의한 익숙함만 남았던 거지. 말하자면 사소한 거였어. 하지만 사랑은 다른 어디에도 아닌 사소한 것들에 깃들어 있거든. 얘들아. 너희는 어리고 귀여워. 조금 더 지나면 학문의 숲을 떠나 삶의 터전으로 들어가게 돼. 그곳에서 춤추기도 하고 울기도 할 거란다. 모든 걸 잃고 모든 걸 얻기도 하겠지. 가끔은 그런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해... 단 한 가지만은 잃어서는 안 돼. 이건 할머니가 임종 몇 시간 전에 나한테 해 준 말이야. 아가야, 가장 중요한 건 즐거움이야. 누구도 너한테서 즐거움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해라. 할머니는 ‘즐거움’이라고 말했어. 나는 그게 종교인들이 말하는 기쁨이라고 생각했는데, 할머니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린 적이 없어. 그 후 난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살았지. 사실 내 남편은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어. 하지만 아주 단순한 이유였단다. 결혼할 때 내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었어. 그런데 즐거움이 떠나 버린 거야. 그래서 이혼한 거지. (p.87)
4. 첫 경험은 언제나 서툴고
_고통스럽고, 그 때문에 나쁜 기억일 경우가 많지만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적어도 로망은 상스럽게 행동하진 않았으니까. 로망은 롱샬롱 아줌마의 조카다. 아줌마의 표현에 의하면 박물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집안에서 자란 스물두 살의 법학도. 침대에서 열심인 착한 남자다. 그렇다 해도 나는 이 막연한 육체의 흥분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이해할 수 없다. 육체의 사랑은 아주 작은 비밀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신비로운 일은 아니다. (p.90)
그리고 로망은 곧 나를 부모님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공증인 아버지와 변호사인 어머니가 사는 곳으로.
모든 집은 각기 나름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서커스단에서는 축축한 톱밥과 짐승들의 털 냄새가 났다. 케르보크 집에서는 밀랍과 마른 회양목 냄새가 난다. 그들이 팔을 활짝 펴고 나를 맞아 준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며칠이 지난 후, 이 집 사람들은 다른 이를 맞아들이는 게 아니라 관찰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케르보크 부부는 그들의 가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계보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망의 줄기, 가지, 잎, 작은 열매를 만들기 위해 몇백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나는 미심쩍은 참새처럼 그림 속에 들어와 있다. 그들은 내가 먹고, 말하고, 침묵하고, 웃고, 옷 입는 법을 면밀히 살핀다. 실망한 눈빛이 로망에게, 그의 막 자라나는 수염에, 구겨진 옷에, 계속해서 내 허리를 잡고 있는 그의 버릇에 쏟아진다. 나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에서 속마음을 읽는다. 다 지나갈 거야. 미래의 공중인이 천한 삶과 어울리는 걸로 시작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지. 어머니는 성녀다. 또 한 명의 성녀이나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유리방을 만들었다. 이곳의 모든 이가 그녀의 겸손함을 치켜세운다. 가장 빈곤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녀 스스로 거절했던 빛나는 경력을. 틀림없이 보장되어 있었던 경력, 케르보크 사람들에게 성공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녀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완벽함의 꼭대기에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눈에 담긴 속뜻을 똑똑히 읽어낸다. 어린 창녀가 남자를 낚아챘군. 그래도 여름을 넘기진 못할 거야. 폭풍우가 지나가게 내버려 두자. (p.93-94)
5. 결혼은 감방일 뿐이야
_둘 모두 감방에 갇히게 되는 것이라고.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나에 대한 로망의 구애는 더 열렬해진다. 사실 그가 쓴 20쪽 분량의 러브레터들은 지루해서 다섯 페이지쯤 읽다 포기해 버렸다. 하지만 로망은 지치지도 않고 자신이 쓴 편지들을 읽고 또 읽는다. 심지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책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마침내 로망은 순종과 이성의 22년을 산산이 부수고, 부모님 앞에서 선포한다. 공증인을 포기하고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딸의 결혼을 알렸을 때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결혼은 감방일 뿐이라고. 들어가기는 쉽지만 나오려면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남편만 교도관이 되는 게 아니라, 둘 모두 감방에 갇히게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나만의 암호와 주문을 외운다. 그 후에 대해선,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결혼식 하객들이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해 호텔로 황급히 뛰어들었다. 그들은 호텔 응접실 구석에 혼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내게 합석을 권한다. 폭우가 떠나자 하객들은 왁자지껄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들을 따라나서던)
신랑은 내게 마지막 눈길을 던졌다. 그 시선에는 고통스러운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욕망과 우수가 더럽게 섞인 무언가. 너와 섹스하고 싶어. 하지만 보다시피, 이 여자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어. 내가 남자의 얼굴에서 이런 마음을 알아챈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함께 일하는 서점 직원을 집에 초대했을 때 로망의 눈에도 이와 똑같은 축축하고 희미한 빛이 반짝였다. 조심해야 한다. 때때로 나를 잠식하는 이런 생각을 경계해야만 한다.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날 괴롭히는 생각. 그건 우리 관계가 전부 가짜라는 생각인데, 그 보다 더 나쁜 건 우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 때로는 가장 깊은 감정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감정에는 지울 수 없는 희극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의 깊이는 사랑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가 많고, 모두 이기심과 연관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가 우는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이 생각 자체는 그리 어리석지 않지만, 그런 생각 뒤에 슬픔이 따라온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진실이란 게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슬픔에 관해서는 알고 있다. 슬픔은 다른 무엇도 아닌 허구라는 걸. 어머니로부터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뚱보를 통해서도 알게 되었고, 최근 몇 달 동안에는 로망까지도 그런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로망은 시를 읽고 있었다. 나는 그 시를 그와 함께 읽었다. 부부 생활은 바닥이 없고 거대하다. 어느 측면에서는 황폐해질 수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조용히 지속해 나갈 수 있다. 부부 생활은 더딘 죽음을 견뎌 내는 커다란 짐승과 같다. (p.117)
6. 크리스티앙 보뱅
_그가 내게 말했다. 울지 않을 때는 책을 읽으라고.
내 첫사랑은 누런 이빨을 가지고 있다.
이런 첫 문장을 가진 소설은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크리스티앙 보뱅.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나는 한 번도 그의 시를 읽은 적이 없지만,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늘 시라고 생각했다. 첫 문장에 숨이 막혀 책갈피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문장에 밑줄을 긋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우주의 모든 기운을 그러모아 수놓은 별자리 같다. 한 문장도 허투루 지 않고 섬세하게 직조해 놓았다.
그를 처음 우리에게 각인시킨 <작은 파티 드레스>는 읽기와 쓰기에 대한 아포리즘으로 가득하다. 동시에 연인이자 이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 아내를 향한 순애보가 날실 씨실로 엮여있다. 그가 읽고 쓰는 삶에 대해 찬사 하는 방식 끝엔, 하루 종일 육아에 지친 여자의 피로가 묻어 있다. '갓난아기는 꿈과 웃음을 주지만, 무엇보다 피로를 가져다준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는 남자다. 시인의 여자들은 하루 종일 장을 보고 아이를 씻기고 아이 공부를 봐주고... 다시 저녁상을 치운 뒤에야 비로소 식탁에 앉아 글을 쓴다.
이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그녀 자신이 되어 있는 순간 그녀는 홀로 종이 앞에 앉는다. 영원 앞에 나와 앉은 가난한 여자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얼어붙은 그들의 집에서 그렇게 글을 쓴다. 그들의 은밀한 삶 속에 웅크리고 앉아. 그렇게 쓴 글들은 대부분 출간되지 않는다. (작은 파티 드레스, p.83)
여왕이 될 거라 기대하며 근사한 사랑을 꿈꿨던 소녀는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제 부엌에서 재투성이의 삶을 살고 있다. 생명을 기르는 일은 숭고하지만 그건 소녀를 죽이는 일이기도 하다. 무사히 이곳에 존재하긴 해도, 그녀는 날마다 자신 안의 무언가가 꺼져감을 느낀다. 소녀를 버리고 차라리 여인으로만 살면 좋으련만. 그녀 안에는 여전히 갈망하는 어린 소녀가 남아 있다. 이게 다야? 인생은 겨우 이 정도뿐이야? 그런 그녀들이 고단한 하루의 끝. 피로 끝에 앉아 글을 쓴다. '온갖 색깔의 노트에다, 온갖 피로 만들어진 잉크로. 밤늦도록 언어 속에 머무른다.' 하루종일 누군가의 쓰임으로 살았던 자신을 내려놓고, 무용하지만 비로소 나답다고 느껴지는 나로 앉아, 글을 쓴다. 백색의 종이 위로 언어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면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고통이 사라지고, 죽었던 그녀의 노래가 되살아난다.
그의 작품에는 늘 노래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이번 소설 <가벼운 마음>에선 뤼시의 어머니다. 주인공 뤼시의 어머니는 ‘언제나 웃음을 터뜨리며 노래하듯’ 말하는 여자다. 딸 뤼시가 가출 후 집으로 되돌아올 때마다 남편의 비난과 질시에 맞서 호탕하게 웃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 덕분에 뤼시는 늘 두려움 없이 세상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세상을 마음껏 경험한 뒤에 집으로 태연하게 걸어 들어올 수 있었다. 어쩌겠는가. 이름 속에 '빛‘을 품고 사는 이상, 자신 안의 빛을 따라 쉬지 않고 움직일 밖에. 누런 이빨을 가진 늑대가 첫사랑인 여자아이에게는 별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은 빛과 늑대와 집시의 유전자를 가진 소녀 이야기다. 뤼시의 삶은 우리와 별다르지 않다. 다른 소녀들처럼 유년의 뜰을 지나고, 배우고 성장하고 사랑하고 결혼한다. 뤼시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결혼 생활 이후 누구에게나 따라오는 삶의 무미건조함을 통과하는 방식이다. 어린 시절의 종말이자, 끝이 불가피한 결혼 생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 안의 꺼져가는 빛을 외면한 채 타인의 시선과 관습에 몸과 마음을 맞추며 살아간다. 인생은 다 그런 거지,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내면의 빛을 꺼뜨리지 않고, 매 순간 찾아오는 사랑에 눈감지 않고, 변화하는 삶에 순응하기. 뤼시에겐 있으나 우리에게 없는 건 어쩌면 이렇게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종달새가 매번 똑같이 노래하는 것 같지만, 노래할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함께 바뀌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종달새의 노래에서 매번 다른 즐거움을 찾아낼 줄 아는 이와 시선과 그렇지 않은 이의 차이 같은 것.
뤼시가 결혼 생활의 1막을 접으며 새롭게 펼쳐나가는 인생의 후반전에 대해서는 책에서 직접 확인하는 게 좋겠다. 새로 사귄 애인인자 불타는 진홍빛 단풍나무가 그녀에게 가져다준 괴물의 사랑,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하기 직전 그녀가 돌연 선택한 꿀벌과 잉크의 시간, 그리고 그녀가 요양원의 무명 할머니와 함께 한 마지막 여정까지 부디 꼭 함께 하시길.
티타티티타티, 타타티타타티. 바흐의 음악과 함께 가볍게 날아오르던 그녀의 삶은 끝까지 빛과 함께였다.
7. 책갈피 etc
- 우울증
그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어. 우울증이 뭔지 아니? 월식 본 적 있어? 우울증은 월식 같은 거야. 달이 마음 앞에 슬며시 끼어드는 거야. 그러면 마음은 자신의 빛을 더는 내지 못해. 낮이 밤이 되는 거란다. (p.20)
- 세 종류의 사람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방랑자, 정착민, 그리고 어린아이. 내 형제인 아이들과 내 형제인 늑대들을 추억한다. 피와 꿈으로 연결된 나는 여전히 그들 중 하나다. (p.24)
- 꿀벌과 잉크의 삶
나는 꿀벌이 좋다. 이곳에 머물며 잉크와 고독과 고요함으로 나의 꿀을 만드는 중이다. (p.31)
- 넘치는 사랑을 받은 사람은
무언가를 빨리, 많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 치열한 삶의 전장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 불편했다. 어머니는 넘치는 사랑을 받은 사람이어서, 하루의 모든 순간을 빽빽하게 채우며 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사람은 사랑받을 때 세상에 무관심해지며 둘러볼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p.43)
- 아버지들의 중병
딸, 왜 왔어? 나는 그에게 이번 학기에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수업에서 거둔 점수들을 고한다. 20점 만점에 15점, 16점, 17점. 얼마나 보석처럼 빛나는 점수들인가. 선생님들의 평은 뜨겁다. 수학과 자연과학에는 젬병이라 통지표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가 언급하는 건 오로지 이 두 점수뿐이고, 두 점수만 지적한다. 그러고는 웃음기 없이 다시 삽을 움켜잡고 땅을 판다. 파고, 던지고, 파고, 던진다. 냉혹한 그의 말은 내게 상처를 주어 내 영혼을 파내고, 학기가 끝날 때마다 좋은 흙과 기쁨을 조금씩 없애 버린다.
...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일이지만, 실은 이미 알고 있다.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살면서 걸리는 여러 가지 병이 있다.... 아버지의 병은 치유가 불가능하다. 바로 완벽주의다. 모든 것을 더 잘해야만 하고, 잘 해낸 일은 절대 없다. 절대, 절대로. 주위 사람을 힘들게 하는 해악이 아닐 수 없다. 한 해가 끝날 때 나는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더는 서둘러 아버지에게 달려가지 않고, 통지표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놔두고, 아버지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 뻔한 얘기를 다시 듣는 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p.70-72)
-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나는 글을 쓸 때 잉크로 쓰지 않는다. 가벼움으로 쓴다. 설명을 잘했는지 모르겠다. 잉크는 구매할 수 있으나 가벼움을 파는 상점은 없다. 가벼움이 오거나 안 오는 건 때에 따라 다르다. 설령 오지 않을 때라도 가벼움은 그곳에 있다. 이해가 가는가?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여름비의 도도한 서늘함에, 침대맡에 팽개쳐둔 펼쳐진 책의 날개들에, 일할 때 들려오는 수도원 종소리에, 활기찬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음에, 풀잎을 씹듯 수천 번 중얼거린 이름에, 쥐라산맥의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모퉁이를 돌아가는 빛의 요정 안에 슈베르트의 소나타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가난 속에, 저녁마다 덧창을 느릿느릿 닫는 의식에, 청색, 연청색, 청자색을 입히는 섬세한 붓질에, 갓난아기의 눈꺼풀 위에, 기다리던 편지를 읽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다 열어 보는 몽글몽글한 마음에, 땅바닥에서 ‘팡’하고 터지는 밤껍질 소리에, 꽁꽁 언 호수에서 미끄러지는 개의 서투른 걸음에. 이 정도로 해두겠다. 당신도 볼 수 있듯,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벼움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물고 희박해서 찾기 힘들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술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p.6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