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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인의 정치적 스탠스

나는 왜 교회에서 계엄 얘기를 꺼낼 수 없었나

by 쏭마담




지난 12월 4일.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선포한 계엄으로 인해 온 국민이 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다음 날.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급히 한 여당 인사를 초대해 전날 계엄의 의미와 당내 분위기를 전하는 중이었는데, 엉뚱하게도 댓글에서는 인터뷰를 하던 진행자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그 프로그램은 평소 다른 시사프로그램에 비해 비교적 중립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그 날도 평소 친분이 좀 있던 여당 내부인을 통해 우회적으로 계엄의 이유와 의도에 대해 접근해보려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댓글은 진행자의 자질을 넘어 평소 그의 중립적 태도에 대한 의혹과 호된 비판으로 이어졌다. 대충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은 워딩이었다.


그가 제대로 된 언론인이었다면, 그날의 계엄의 부적절함과 그 위험성을 생각할 때 한가롭게 중립성 따위 운운할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적절치 않은 여당 인사를 초대해서 스포츠 중계하며 남의 일 관망하듯 뉴스를 진행'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5.18 등의 아픔을 겪은 우리나라에서 조금이라도 역사의식이 있는 언론인이라면 언론의 중립성 이전에 계엄이라는 사태의 엄중함을 잘 알고 있어야 했고,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총동원해서 그 심각성을 알렸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날 그 진행자는 '계엄'을 '내란'이라고 판단할 정도의 자기 자질과 스탠스를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위급한 상황에 그 힘을 제대로 쓰지 않음으로써 언론인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이었다.


논란 이후 정작 놀란 건, 나 자신이었다. 나 스스로도 그 댓글들을 보기 전까지는 그 진행자의 스탠스에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원래 개인적이고 염세적인 데다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시끄러운 일에 연루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그저 차악의 후보에게 투표하며 국민의 한 표를 행사하는 정도? 철학과 인문학 근처를 맴돌며 한나 아렌트 같은 정치철학자가 인간 본성과 사회를 해석하는 예리한 안목 같은 것에는 매력을 느꼈지만, 정작 내가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이 세상, 즉 대한민국 정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다. 자라면서 한 번도 완장(반장 부반장 따위) 같은 걸 차본 적 없는 성장 배경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늘 다른 사람들 사이에 n명의 무명인으로 있을 때 가장 편했고, 적극적으로 무언가 주장해 본 적도, 그걸 싸워 관철시켜 본 적도 없었다. 그게 그렇게 싸울 만큼 대단한 사안인가 생각하면, 늘 세상에 그렇게 목숨 걸고 싸울 만큼 대단한 가치 따위 없어 보였으니까. 서로에게 삿대질하며 옥신각신 하는 국회의원들의 단면으로 상징되던 정치는 전~혀 나 같은 주변인과는 거리가 먼 세계이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내 스탠스는 내 기질과 잘 어울렸기에, 그것이 누군가에게 비판받아야 할 만한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진행자를 향한 날 선 비판에 되려 당황한 건 되려 내 쪽이었다. 언론인이라면 당연히 중립적이어야지. 요즘의 세대 격차, 남녀 혐오, 극좌와 극우 진영 같은 갈라치기 현상 모두 한쪽으로 치우쳐진 레거시 미디어와 유튜브 채널 때문에 더 강화되는 게 아닌가? 근데 중립적이라서 비판을 받는다고? 그때부터 정치라는 세계에 제대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란죄가 적용된 전직 대통령이 체포 및 구속되는 과정에서 양당이 힘겨루기 하는 국회와, 이들을 각각 지지하는 국민들의 정치적 행동, 지루하고 복잡한 검찰과 법원의 사법 처리 과정을 지켜보았다.


양쪽의 공방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북한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이 위협받는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서민의 삶은 이렇게 팍팍해져만 가는데 맨날 공주옷 입고 해외순방 놀이나 다니는 대통령 부부 때문에 자주 삶에 위협을 느꼈다. 지난 몇 년간 언론이 그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볼드모트의 어두운 기운과 피로감이 저절로 따라왔다. '우매함이 사악함 보다 위험하다'는 본 회퍼의 경구가 딱 들어맞는 대통령이었다. 국민을 위해 일하라고 쥐어준 권력을 추악한 사적 이익을 도모하고 감추기 위해서 사용하고, 이를 비판하자 오히려 군경을 동원해서 우리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그러니 사회 질서를 교란시킨 것도, 비상계엄 선포문에 적시한 '반국가세력'도 바로 대통령 부부 자신이었다.이 시국에 비상계엄을 할 만한 이유와 명목은 독재자 부부 자신에게 밖에 없었다. 계엄은 내란이 맞았다.


그리고 알았다. 12.3 계엄이 3시간 안에 재빨리 저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부터 이를 주시하고 준비해 온 수많은 이들의 관심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12월 3일 밤 언론을 통해 계엄 브리핑이 발표되자 국회의원들은 즉시 국회의 담을 넘고 들어가 비상계엄 해제요구안을 결의하였다. 수많은 시민들이 그 밤에 목숨을 걸고 국회의사당 앞에 몰려가 야당 의원들을 지지했으며, 투입된 군경은 부당한 명령에 소극적으로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참극을 막았다. 그리고 대중의 무관심과 계속되는 검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실을 향해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일부 언론인들의 사투가 있었다.


계엄 이후 하나 둘 내가 몰랐던 그간의 기록들을 찾아보며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불의에 대해 침묵하는 자였기에 계엄이 일어나도 신변에 큰 위협을 느끼지 못했던 거였다. 역사를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없어서 왜 계엄이 내란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지난 2년 간 대통령의 무능함과 오만함에 치를 떨면서도 한숨만 쉬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내가 무지한 동안 나는 그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었다. 내가 바로 역사를 모르는 자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내가 뒤늦게 정의라고 알게 된 사실과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 반대편에 늘 기독교 입네 하는 이들이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내가 불의라고 믿고 있는 그것을 정의라고 외치며 광장에 나와 있었다. 내 눈에 그들은 상식도, 법도, 역사도 모르는 이들이었는데, 그들은 그 일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이라며 자행했다. 전직 대통령의 체포, 구속, 탄핵으로 이어지는 그 모든 아슬아슬한 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기독교를 대표하는 대형 교회 목사들은 강단에 서서 그들을 저지하기는커녕 알게 모르게 뒤에서 지지했다.


결정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모르는 대중들이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그들을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오해하는 동안에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교단과 교회와 목사들은 몇몇을 빼고 모두 침묵했다. 교회들은 여느 때처럼 일요일마다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고 친목을 도모했지만, 교회 안에서 계엄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지 않았다. 계엄의 엄중함은 교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아니, 내부의 평화를 깰 만큼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어느 날 교회에 가서 기도하며 나는 '기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늘 그 단어와 함께였다는 것도.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좀 길게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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