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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의 이름은 나발, 어리석은 자였더라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날의 설교

by 쏭마담




계엄이 있고 2주 후. 목사님의 주일 설교 제목은 '그의 이름은 나발이라(사무엘상 25장 2~13절)'였다.


'어리석음'의 대명사인 '나발'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광야생활을 하고 있던 당시 인근에 살고 있던 당대 유명한 부자다. 다윗은 평소 자신의 부하들과 나발의 가축 및 하인을 들짐승이나 도적들로부터 지켜주었고 대신 이들로부터 약간의 식량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발은 평소 다윗에게 받은 이런 선의를 모른 채 하고 오히려 다윗을 모욕함으로써 식솔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인물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완고하고 무례한 성품으로 평상시에도 귀를 닫고 혼자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불량한' 사람이었으며, 포도주에 자주 취하여 사리분별을 못하는 술꾼이기도 했다.


그날의 설교는 성경 안에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에 대해 경고하는 '잠언'을 인용하면서, 당대 지혜를 가르치는 문헌들이 1차적으로는 왕과 지도자들을 위해 쓰인 것임을 언급했다. 힘을 가진 한 사람의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이어 12.3 비상계엄에 대한 목사님의 짧은 소회가 이어졌다. 일상을 살던 평범한 국민들에게 어느 날 선포된 비상계엄의 당혹스러움, 비상계엄이 신속하게 해제되지 않았을 경우 국회, 지방의회, 사법기관, 언론, 의료인을 포함한 단체와 국가기관들이 군인들에게 장악되었을 때의 아찔함, 민주주의가 정점에 이른 오늘날 국민을 무력으로 장악하겠다는 이 시대착오적인 판단에 대하여... 우리는 오늘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셋째 주를 맞이하여 모두 깨어 주어진 자리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고 마무리 하셨다.


"주님 저희의 아둔함과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은혜를 저버리고 불량한 성품으로 살다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나발을 반면교사 삼게 해 주시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지혜로운 생각 성품을 얻어 살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 하셨사오니 깨어 있게 해 주시고, 맡겨진 내 삶의 자리에서 부끄럽지 않은 자로 살게 해 주옵소서. 은혜를 베풀고 타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진리와 생명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치는 불안정하고 경제 전망은 어둡고 외교는 위태롭고 국민들의 마음은 무겁고 지쳤습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 주님의 손으로 이 나라 이 백성 붙들어 주시고 주님의 공의와 주님의 평화가 임하고 하늘에서 이루어진 우리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당신의 선택받고 사랑받는 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계엄에 대해 하나 둘 드러나는 진실 앞에 여전히 우리는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과정들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지난 2주 간의 시간에 비하면 그날 설교문은 오히려 안온한 톤이었다. 목사님의 설교는 객관적인 사실로만 기술되었고, 기도문은 내부의 반성과 결단을 촉구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오늘까지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설교 강단에서 다시 그날의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날 설교 이후 목사님은 몇몇 어른들로부터 교회 안에서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우리 교회가 저 광장에서 성조기와 이스라엘 기를 동시에 흔드는 여느 대형교회와 비슷한 구성이라고 오해하실 분이 계실까 하여, 부가 설명을 드리겠다. 우리 교회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다른 건 몰라도 지금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 얻어먹는 각종 대형교회의 문제들과는 가장 대척점에 선 교회라고 자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10여 년 전, 분당에서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비리와 전횡을 온몸으로 비판하다가 고초를 겪고 나온 성도들이 그곳을 나와 새로 개척한 작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교회는 목사라면 무조건 아멘~ 하는 그런 고분고분한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가 아니라 반골 기질 다분한 교인들로 구성된 교회란 말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깨어 있는 성도들로 가득한 교회였다. 그러니 12.3 내란 이후, 교회 안에서 계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내 입을 막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스스로 발언할 수 없었을 뿐이다. 이 분들이 10년 전 교회 안에서 '정의'를 부르짖다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리고 그 일이 아직도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아 있는지 함께 지내는 7년 동안 어렴풋이나마 나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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