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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목사의 비리를 고발하자 그들은

우리에게 '신천지'와 '종북좌파'라고 말했다

by 쏭마담

다음은 우리 교회 교인들이 들려주는 이전 교회 이야기다. 한때 자기 몸보다 더 사랑하고 섬겼던 교회와 성도들. 하지만 그들이 목사의 비리를 지적했을 때 겪어야 했던 분열과 고초들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지금의 일부 한국 대형교회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규모를 키우고 비리의 온상이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 잘못된 열심, 전도대회

B교회의 처음은 여느 평범한 교회와 다르지 않았다. 성경뿐 아니라 자기 계발을 적절히 가미한 C목사의 설교 스타일은 고리타분하지 않아 좋았다. 교양 과목을 듣는 것처럼 귀에 꽂혔고, 생활 접목형 설교라 실생활에 적용하기도 쉬웠다. 당시 남편을 따라 이리저리 임지를 옮겨 다니다 처음 정착한 교회였기에 개인적으로 애착이 남달랐다. 이제 안주해 열심히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크던 시절이었다. 지역장을 맡아 팀원들을 섬기고, 동호회를 꾸리고, 주보를 만들고, 각종 선교와 문화 사업에 투입되어 활동했다. 교회를 위한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열심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C목사는 부목사들을 삼성휴먼센터에 보내 삼성맨들의 조직체계를 배워 와 교회에 접목시킬 정도로 교회 성장과 운영에 관심이 많았다. 전도대회가 시작되면 그날로 교회 입구에 화려한 교구별 현황판이 내걸렸다. 성도들은 한 영혼이라도 교회로 이끌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았지만 스티커 막대기에 목숨을 걸었다. 8교구 총문들은 매달 활동비로 받는 돈을 풀어 사람들을 열심히 교회로 끌어 모았고, 심지어 옆 교구장은 거리로 나가 돈을 주고 홈리스를 사 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분당에서 동백과 판교까지 전도를 하러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진심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염원이었을까 싶은. 어쩌면 눈먼 성과주의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그러나 열심만큼은 진심인 시절이었다.


# C목사의 사조직, 유겐트

B교회 출신들은 어딜 가나 능력자로 통했다. 성장기 한국 교회를 흔들던 단어들- 성과주의, 능력주의, 번영주의 신앙의 모든 것이 이곳에 있었다. 남자 성도들은 ‘O스라 활동’이라고 해서 새벽부터 교회에 출석했다. 한차례 설교 또는 강의를 듣고 나면 모두 한데 모여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일제히 세상, 아니 직장으로 파송되었다. 특히 B교회는 장학사업 등 청년들에 대한 물적 지원과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나 또한 이런 교육과 강연에 수강자와 강사로 몇 차례 참석해 본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교육 내용이랄 건 별것 없었다. 하지만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으쌰으쌰 하는 아우라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그때 C목사는 자기 수하에 나치 유겐트 같은 청년열성당원들을 키운 셈인데,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나중에 B교회 문제가 터지자 물불 안 가리고 목사 편에 서서 C목사를 옹호하는 친위대 역할을 톡톡히 해내게 된다. 그렇게 분별없는 시절이기도 했다.


# 작정 헌금

연초 1월 둘째 주 설교 시간엔 매년 작정헌금을 결단했다. C목사는 헌금 전 이런 말로 성도들을 설득했다. “우리는 사람을 키우는 교회다. 장학금을 주고 인재를 키워서 세계로 진출시키는 게 우리의 사명이다”라고. 작정헌금봉투를 나눠 주면 우리는 앉은자리에서 서로 지켜보는 가운데 금액을 적어내야 했다. 당시는 글로벌 위기로 주가가 폭락하고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 속출하던 때였지만, 교회는 그런 성도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았다. 기억에 최소 300만 원 이상을 적어내라고 했던 것 같다. 다른 선택은? 글쎄, 쉽지 않았다. 감사헌금의 금액이 믿음의 분량이요 수준이라고 우리는 늘 들어왔으니까. 개인의 필요보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먼저였어야 한다고 배워 왔으니까, 순종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적어냈다. 1천 번제 기도봉투라는 것도 있었다. 3년 동안 매일 봉투에 기도 제목을 적어내는 것이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는 법. 봉투엔 기도 제목과 함께 헌금이 담겼다. 성도들의 코 묻은 돈까지 탈탈 교회 재정으로 들어갔다.


# 직분 놀음

C목사는 특히 사회에서 지위와 신분이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당시 나는 교회에 잘 나가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오랜만에 한번 예배에 참석했던 날. 나를 붙들고 로비에서 막 기도를 해주는가 싶더니 이내 자기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내 앞에서 펀드 투자를 통한 장학 기금 조성이 어쩌고, 원대한 자신의 포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얼마 후엔 내게 안수집사를 받으라고 종용했다. 옆에 있던 아내가 “교회도 잘 안 나오는 사람에게 무슨 안수 집사냐”며 오히려 반발하자 잠시 당황하는 듯 돌아서더니, 그러곤 한동안 교회 안에서 인사를 해도 받지를 않았다. 목사가 주면 냅다 황송해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일개 성도가 딴지를 걸었다는 사실이 언짢았던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집사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전교인 헌금 리스트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당시 “십일조 헌금이 입금되는 순간 집사 준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 펀드 투자

그즈음 증권가 찌라시처럼 교인들 사이에서 “C목사가 헌금을 빼돌려 펀드에 투자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한참 뒤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초창기 70-80억쯤 투자했던 돈은 2007년에 20억까지 내려가 반의 반토막이 됐다. 그러던 것을 성도들이 낸 헌금으로 겨우 메꿔 유지되다가 2009년 경기가 좀 회복되면서 간신히 원복을 했다. 이것이 나중에 B교회 사태 터지고 1년 있다가 8억 쯤 불어 플러스로 돌아섰는데, 나중에 그들은 이 일을 두고 되려 “돈 벌었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적반하장 식으로 나왔다. 이건 분명히 교회 돈을 목사 개인이 함부로 횡령한 것이오, 정확히 말하면 배임에 다름 아니다. 그때 이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그 수익금을 이 C목사가 몰래 착복했다 해도 교인들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돈을 벌었으니, 아무 문제가 안된다니. 장학기금 하나를 조성하더라도 당회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당시 C목사는 이런 기본적인 개념조차 없었고 교인들 또한 이런 일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게 당시 한국 교회의 수준이었다. 이 일로 나중에 우리는 목사와 재정 장로를 함께 고소하게 된다.


# 담임목사 사례금

담임목사 급여 연봉만 4억이 넘었다. 자녀들은 모두 해외유학을 보냈는데 교육비, 활동비, 귀국할 때마다 타고 들어오는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 모두 뺀 금액이 그 정도였다. 이뿐이 아니다. 목사가 주일학교 여름캠프에 한번 방문하면 출장비로 300만 원이 지급됐다. 이건 본예산에서 지급되는 것이고, 주일학교 예산에서 또다시 이중으로 출장비가 지급되었는데, 당시 아무도 이런 사실을 몰랐다. 속된 말로 담임 목사 하나가 성도들 헌금을 갈고리로 긁어 혼자 돈잔치 하고 다녔는데, 그 사실을 재정 장로만 빼고는 아무도 몰랐다. 성도들의 헌금으로 쓸데없는 맹지를 사들이고, 문어발 식으로 세를 확장하고, 교회가 본모습을 잃어가는 동안 아무도 몰랐다.


# 산악회, 여집사와의 추태

그렇게 4년. 터질 게 터졌다. 교회 산악회 또한 목사의 측근들이 모인 사조직 비슷한 것이었다. 본인이 원한다고 아무나 들어가는 게 아니고, C목사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입이 무거운 사람들만 비공개 심사를 통해 들어갔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산악회 멤버 중 A집사 하나가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목사와 둘이 커플룩을 맞춰 입었다던가, 산에 가서 둘만 차 안에 남아 있었다던가... 소문이 무성해 지자 교구장들은 몇 차례 C목사에게 산악회 해체와 물의를 빚은 A집사와의 관계 해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은 C목사는 그때마다 “우리들은 집안끼리 친한 것이다”며 교구장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그러던 어느 해, 이 C목사가 목회 비전 운운하며 측근 몇 명과 함께 떠난 미국 라스베이거스 동서 횡단 여행에서, 빼도 박도 못할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연애 놀음에 빠져 미처 뒤따라 오던 다른 여집사들을 의식하지 못한 C목사가 그만 문제의 A집사 엉덩이에 손을 얹는 사건이 목격된 것. 이런 추접하고 노골적인 행동에 더 이상 참지 못한 다른 여집사 하나가 이 사실을 이메일로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삽시간에 교회 안에 소문이 퍼져나갔다.


# 교구장들의 사태 수습, 당사자들의 번복

교구장들은 이 때다, 하고 C목사 길들이기에 나섰다. 목사가 귀국하기 전 이 사실을 A집사의 남편에게 알리고 이들 부부가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조용히 사건을 무마시키기로 한 것. 비전 여행에서 돌아온 C목사도 처음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당회의 조처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말이 바뀌었다. 이렇게 떠나면 모든 오명을 본인과 자신의 가정이 뒤집어쓸 것이 뻔히 보인 A집사 부부가 떠나길 거부했다. 남편 집사도 “이 일은 그저 아내가 목사님을 잘 섬기고 대접하려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가족끼리 이렇게 친한데 이상한 짓 할 리가 없지 않으냐”며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두 가정이 너무 친해 벌어진 오해라며 C목사와 똑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 재직회와 성도들의 반발

더 이상 목사 감싸기에 나설 수 없다고 판단한 교구장들이 재직회를 소집했다. 원래 20-30명씩 모이던 회의에 무려 1300명이나 되는 교인이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때만 해도 담임목사 편은 없었다. 본당을 꽉 채운 성도들에 기가 죽은 C목사는 부목사들을 길게 줄 세우기 하더니 “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자기 대신 사과를 시켰다. 그리고 서둘러 사태를 봉합하고 재직회의 폐회를 선언하려 했다. 순간, 강단 있는 집사 한 명이 손을 들고 구체적인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어쩔 수 없이 C목사가 어물쩡거리며 사과를 하자 그때부터 여기저기에서 항의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날 재직회를 계기로 그때까지는 이런저런 소문에도 설마, 했던 많은 성도들이 본격적으로 C목사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 노회의 사표 수리 철회

그때 마침 오마이뉴스 기자로 일하던 한 성도가 이 사건을 기사화하면서 C목사 건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C목사도 어쩔 수 이 사임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이 그는 뒤에서 노회를 회유하고 자기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한해 예산만 수십 억이 되는 교회였다. 교회 예산 집행과 관련해서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이 너무 많았다. 처음엔 구역장과 총무, 장로 모두 한 목소리로 C목사의 행실에 항의하고 나섰다. 하지만. ‘C목사 길들이기’로 끝날 줄 알았던 일이 교회 재정 장부를 공개하는 요구로 일파만파 확대되자, 교회에서 활동비를 받고 해외여행을 다녔던 총무와 장로들이 C목사 편으로 돌아섰다. 혹 C목사가 고소당하면 자신도 안전하지 않겠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C목사를 옹호해야 했다. 이어 노회 또한 C목사의 사표 수리를 거부하며 사태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이때부터 교회 안에서도 C목사파와 반대파가 확연히 나뉘게 되었다.


# O포천, 프레임 씌우기와 갈라치기

교회 분열이 시작되자마자 ‘O포천’이라는, C목사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성경 속 인물 다윗을 끌어와 C목사를 옹호했다. “목사가 죄가 없는 건 아니지만 간음한 다윗을 봐라, 그에 비하면 그리 심각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리고 하나님이 세운 자를 사람이 직접 처리하면 안 된다... 자고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서로 용서하고.. 또... 성도가 분열되면 교회가 무너지고 그럼 세상 보기에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서도 죄가 된다.”

반대파에 대한 프레임 씌우기 작업도 시작되었다. C목사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신천지와 종북 좌파로 몰아가기. 엊그제까지 함께 한솥밥 먹고 함께 예배하던 교우들이 다른 교우를 향해 “교회를 분열시키기 위해서 교회에 침투한 신천지”라고 손가락질했다. 검사에 쓰리스타 출신의 성도들도 졸지에 종북좌파로 매도되었다. 그들은 반대파 성도들의 일터에도 민원을 넣었다. C목사 반대파들은 교회를 훼방하는 악덕 변호사요, 품위 유지의무를 위반한 공무원이 되었다. 목사 개인의 비리에서 시작된 B교회 사태는 한 가족 같던 교인을 서로 갈라치기 하게 만들었다. 성도들은 목사의 비리 보다 엊그제까지 형제요 자매였던 이들의 배신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먹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고소 고발이 시작되었다.


# 진흙탕 싸움, 본당 점령과 고소 고발

평생 경찰서 문간에도 안 가본 사람들이 ‘예배 방해, 폭력죄’ 등 크고 작은 명목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몸싸움을 해본 적 없던 사람들이 주일이면 강대상을 점령하기 위해 새벽부터 교회로 쳐들어갔다.(일정 기간 목사가 강대상에 서지 못하면 직무 유기 등의 이유로 목사 자격을 박탈할 수 있다). 사태를 관망하던 교인들도 피치 못할 몸싸움과 언성이 오가며 경찰서로 연루되는 일이 늘어났다. 시위에 참석하는 성도들의 규모가 늘어났다. 나 또한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럽고 치사하면 손 떼고 떠나는 스타일인데, 상황이 점점 사람을 전사로 내몰았다. 처음엔 우리도 C목사에 대한 일말의 존중이 있었다. 괜찮은 목사인데 우리가 뭔가 착각을 해서 엇나갔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잘못을 부인하고 말을 바꾸고 나중엔 자기 세력을 규합하며 너무 뻔뻔하게 나오니까, 공의에 대한 분노가 생긴 것 같다. 여기에,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가치관에 대한 혼동, 사람에 대한 믿음과 배신 등이 총체적으로 밀려들면서 진흙탕 싸움이 시작되었다.


# 게으른 선인은 부지런한 악인을 이길 수 없다

1년 가까이 크고 작은 법정 소송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사람들도 지치기 시작했다. 원래 게으른 선인이 부지런한 악인을 못 이긴다. O포천이 교단, 부목사, 구역장과 총무라는 조직으로 똘똘 뭉쳐 치밀하게 움직이는 동안 우리는 생업을 마친 뒤에야 늦은 시간 동네 카페에 모여 피곤한 머리를 맞대었다. 그동안 C목사 측이 고소한 건은 거의 다 우리 쪽 승리로 끝났다. 재정장부 열람도 1,2차 까지는 승소했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동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걸 잃으면 모든 걸 잃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우리는 그렇진 않았다. 오랜 고소 고발로 지친 성도들 사이에서 이제 잊고 새 출발 하자는 목소리가 슬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교회에서 200미터 떨어진 비전센터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자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교인 중 무려 1300명이 문제의 교회를 떠나 비전센터에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C목사 측은 법원에 ‘고소한 주체’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 이 고소는 의미가 없음을 어필했다. 이제 남의 교인이 된 사람들이 자기 교회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없다는 거다. 그 일 이후 1년 가까이 끌어왔던 법적 공방은 이렇게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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