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역학 : 사람은 만나면 연루된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B교회 사태 이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C목사가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는 걸 뻔히 알면서 왜 더 빨리 떠나지 않았는가.
처음엔 몰랐고, 하지만 알고 나서도 그들은 바로 털고 떠나지 못했다. 저 장사꾼이 저기 서서 뭐 하나, 싶으면 한 번씩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몇 년 간 고민과 갈등 중에서도 교회를 떠날 각오는 쉽게 서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바로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동안 함께 울고 웃으며 동고동락했던 성도들. 섬기고 양육했던 이들을 버리고 차마 떠날 수 없었다. C목사가 얼키설키 만들어놓은 조직은 그들이 C목사의 비리에 대해 비판하고 토로하는 역할도 했지만 동시에 공감하고 서로 위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교제권이 그들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붙잡아 두었다. 목사의 비리가 적폐가 되어 쌓이는 시간만큼 교회와 성도들 간의 관계도 돈독해졌다. 하지만 그들이 공의에 분연히 일어나 아니요,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이미 각자의 방식으로 교회와 여러 이해관계 속에 얽혀 있었다. 연루된 시간만큼 스스로에게 되물을 시간이 필요했다. 교회란 무엇인가, 올바른 신앙이란 무엇인가, 정의는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할 시간이.
두 번째로 많이 받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한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이렇게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했었나.
그들은 이구동성 대답했다. 고통스러웠지만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삯꾼이 떠들어 대고, 교인들이 눈먼 열심에 취해 내달리고, 서로에게 삿대질하고 상처 주던 시간. 그것과 별개로 그들의 믿음은 자라고 있었다. 시련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졌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모든 교회는 자기 수준에 맞는 목사를 갖는다. 돌아보면 목사만 삯꾼이었던 것이 아니다. 교인이 영적 분별력이 없으니 목사가 삯꾼 놀이를 해도 잘못인지 모른다. 한 번도 제재당해 보지 못한 목사는 계속 비리를 저지른다. 따르는 교인이 없는데 목사 혼자 존재할 수 없다. 교회 사태를 겪고 지나오는 동안 그들은 비로소 배웠다고 고백했다. 권력은 부패한다. 권력은 특정인에게 집중되면 안 된다. 목사 개인에게 의존하는 교회가 되어선 안된다. 법과 제도라는 것은 사람의 악의를 전제로 하는 거다. 지금은 모두 좋지만, 지금은 모두 최선을 다하겠지만, 혹 잘못되고 변질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교회의 정관은 그렇게 초창기 설립 멤버들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만들어졌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 그런 가능성을 열어놓고 지금의 교회를 세울 때 정관과 운영위 제도 곳곳에 소소한 장치를 심어 두었다. 담임 목사를 섬김 목사로 제한하고, 섬김 목사와 부목사의 갭을 줄여 권력을 분산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절차를 지켜서 한다는 교훈을 새기고 청빙과 재신임 기간을 분산했다. 다른 교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동안은 교패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내 교회만 생각하지 말고, 개교회 주의로 변질되지 말자는 다짐을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교패 하나까지 뭐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억하고 싶었다고 한다. 누군가 왜 그 교회는 교패가 없나요?라고 물을 때, 그 이유를 설명하며 초창기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길 바랐다.
독일에 가면 유대인 학살을 기념하는 메모리얼 뮤지엄이 있다. 피해자인 유대인들에게나 가해자인 독일인들 모두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과거이지만, 그들은 도시 전체를 추모 공간으로 만들어 그날을 기념한다. 베를린 길거리 곳곳에는 나치 시절 학살된 이들의 이름과 사망 정보를 기입한 동판이 그들이 살던 집 앞 보도에 설치되어 있다. 독일-이스라엘 간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경제 배상 협상에 의해 2차 세계대전으로 피해를 입은 유대인과 가족들은 죽을 때까지 연금 형태로 피해보상액을 지급받게 했다.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는 틈 날 때마다 가해국이었던 자신의 조국을 대신해 피해 국민들에게 무릎 꿇고 사과했다. 초등 5학년 역사책에는 조국 독일이 유대인들에게 저질렀던 만행을 가감없이 기록해 가르친다. 심지어 교실 안에서 질문이 있으면 손을 드는 대신 손가락만 살짝 들어 올린다. 혹여 손을 드는 행동 자체가 나치 경례를 연상시킬까 경계하기 위해서다.
그들이 굳이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 부모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 이전에 그들은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똑같은 전범국이지만 일본과 독일이 매번 비교되는 이유다. 독일이 오랜 기간 과거를 청산하는 동안 일본은 어떠했던가. 일본 정부는 종군위안부는 일본과 아무 상관없다고 발뺌해 오다가 1992년에서야 위안부 문제를 일부 인정했지만, 1965년 한일협정으로 과거사를 이미 정리했다고 주장했다. 이후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끊임없는 부인과 망언의 되풀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하는 대신 자기들도 전쟁 피해자임을 앞세웠다. 일본 또한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피폭국임을 내세워 역사적 책임을 회피했다. 이후 전범 후손들이 집권여당을 차지하며 경제력과 로비를 앞세워 과거의 책임을 지우는 일에 앞장섰다. 위안부 기록 문화재 등재를 막아서거나, 결의안 채택을 방해하거나 소녀상 설치를 저지하는 등.
10여 년 전. 그 많은 구설수를 낳으면서 분란을 일으켰던 그 교회와 목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건재하다. 지금도 포털에 그 교회와 목사 이름을 넣으면 탐욕이라고는 전혀 거리가 멀어보이는 목사의 얼굴과 그 목사의 설교가 좌르르 검색된다. 철저하게 신분세탁한 그 목사와 교회는 심지어 구독자가 3천 명이 넘는 유튜브 채널을 보유 한, 이 지역을 대표하는 대형 교회로 자리 잡고 있다. '역사와 사회를 의식하고, 성도들의 영적 건강을 책임지고, 각종 오피니언 리더 양성과 장학 사업을 지원하는' 번듯한 교회로. 그들이 한창 싸울 때 우리 교회 성도들은 ‘불편한 진실’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이 사태를 낱낱이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C목사는 인터넷 청소업체를 고용하여 기사와 댓글을 모두 지우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했고, 우리가 생업으로 바빠 일일이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에 올린 글들은 아무도 모르게 삭제되어 사라졌다. (블로그에 올린 글에 대해 누군가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그 글에 일일이 회신하거나 답변하지 못하면 일방적으로 삭제가 가능하다고 한다).
일본이 과거 행적을 삭제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역사를 부인하는 행태와 얼마나 똑같은지!
우리 교회 성도들은 지금도 그때 교회의 분열과 뿔뿔이 흩어진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교회와 믿었던 성도들에 대한 실망으로 상처받아 떠난 수많은 이들. 특히 예민한 시기에 성도들 간의 진흙탕 싸움을 고스란히 지켜본 자녀들의 낙심과 절망에 대해 생각하면 그들은 요즘도 눈물 짓는다.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친구가 적이 되고 존경하던 어른들이 서로에게 삿대질 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이 뿌리 채 흔들렸다. 하지만 지금도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간이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또다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을 되새기기 위해.
그래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다.
[참고] <와이즈맨> 다니엘이 읽어주는 월드와이드 뉴스 : 전범 국가 일본이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진짜 이유